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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장아함경

불설장아함경 제14권

블로그스타 2017. 5. 10. 01:08

불설장아함경 제14권

 

후진(後秦) 불타야사(佛陀耶舍)ㆍ축불념(竺佛念) 한역

 

[제3분] ②

21. 범동경(梵動經)1) 제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마갈국(摩竭國:마가다국)을 유행하실 때에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인간 세상을 유행하시다가 죽림(竹林)에 이르러 왕의 전당에 머무셨다.

그때 선념(善念)이라는 범지(梵志)가 있었는데 선념의 제자 이름은 범마달(梵摩達)이었다. 그들 스승과 제자는 항상 부처님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과 법과 비구 대중을 헐뜯었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써 부처님과 법과 비구 대중을 칭찬했다.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엇나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습관이 다르고 소견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많은 비구들은 걸식한 뒤에 강당에 모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세존께서는 큰 신력을 지녔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의 마음과 좋아하는 바를 다 아신다. 저 선념 범지와 그 제자 범마달은 여래와 비구 대중을 따라다니는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들을 비방하고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칭찬한다.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것은 소견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고요한 방 안에서 사람의 귀보다 뛰어난 청정한 천이(天耳)로써 모든 비구들이 말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셨다. 세존께서는 고요한 방에서 일어나 강당으로 나아가 대중 앞에 앉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일부러 물으셨다.

“비구들아, 너희들은 무슨 인연으로 이 강당에 모였고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가?”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들은 걸식한 뒤에 이 강당에 모여 여럿이 이야기했습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특별하다. 여래께서는 큰 신통력이 있고 위덕을 구족하여 중생들이 마음으로 지향해 나가는 것을 아신다. 지금 선념 범지와 그 제자 범마달은 항상 여래와 스님들을 따라 다니는데, 선념 범지는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스님들을 헐뜯고 그 제자 범마달은 무수한 방편으로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찬양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소견이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강당에 모여 이런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방편으로써 여래와 법과 스님들을 헐뜯더라도 너희들은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나와 법과 비구들을 비방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해칠 뜻을 일으킨다면 너희들은 곧 스스로 궁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분노에 찬 마음을 품고 저들을 해칠 뜻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비구들아, 만일 부처와 법과 스님들을 칭찬하더라도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또한 기뻐하며 경사스럽게 여길 것 없다. 왜냐하면 만일 너희들이 환희심을 가지면 곧 궁지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기쁜 마음을 내어서도 안 된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威儀)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것일 뿐인데, 범부들이 들은 것이 적고 깊은 뜻을 몰라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 찬탄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것일 뿐인데, 범부들이 들은 것이 적어 곧 저의 소견으로써 제가 본 그대로를 찬탄한다’고 하는가? 그들은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살생을 소멸하여 살생을 없앴으며 칼과 몽둥이를 버리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품고 일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

이것은 소소한 인연으로서 위의를 지키고, 계행을 따르는 일일 따름인데, 들은 것이 적은 저 범부들은 이것을 가지고 부처를 찬탄한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을 소멸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 마음을 없애 도둑질할 마음이 없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음욕을 버리고 범행을 깨끗이 닦으며 한결같이 계를 지키고 음탕함을 익히지 않으며 행하는 바가 청결하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거짓말을 버려 없애고 하는 말마다 진실하고 성실하여 세상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또 이렇게 찬탄한다.

‘사문 구담은 두 말[兩語]을 버려 없앴다. 그리하여 이쪽 사람의 말로 저쪽 사람을 헐뜯지 않고 저쪽 사람의 말로 이쪽 사람을 헐뜯지 않는다. 다툼이 있으면 잘 화합시키고 이미 화합하면 그 기쁨을 더하게 한다. 또 말을 하면 화합하는 말만 하고 성실하게 남의 마음을 살펴 때에 맞게 말씀하신다.

사문 구담은 악한 말[惡口]을 버려 없앴다. 만일 추한 말로 사람을 손상하면 그 맺힌 원한은 늘어나고 원한과 미움이 자라게 되는데 그런 추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여러 사람들이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항상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그런 착한 말만 한다.

사문 구담은 꾸밈말을 버리고 없앴다. 때에 맞는 말ㆍ진실한 말ㆍ이로운 말ㆍ법다운 말ㆍ율(律)다운 말ㆍ잘못을 그치게 하는 말 이런 말만 한다.

 

사문 구담은 술 마시기를 버리고 향화(香華)로 몸을 치장하지 않으며 노래와 춤을 구경하지 않고 높은 평상에 앉지 않는다. 때 아닌 때에 먹지 않고 금ㆍ은을 지니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과 남녀의 종을 두지 않고 코끼리ㆍ말ㆍ돼지ㆍ염소ㆍ닭ㆍ개 및 모든 새나 짐승을 기르지 않고 상병(象兵)ㆍ마병(馬兵)ㆍ차병(車兵)ㆍ보병(步兵)을 기르지 않는다. 밭과 집을 가지지 않고 5곡을 심지 않으며, 주먹으로 남과 맞서지 않고 말과 저울로써 남을 속이지 않는다. 또한 판매하거나 계약하지도 않는다. 또한 저당을 잡고 빚을 주어 함부로 이익을 내지 않으며 또 음모를 꾸미거나 면전(面前)과 배후(背後)를 다르게 하지 않는다. 때가 아니면 행하지 않으며 몸을 위하고 목숨을 기르기 위해 알맞게 먹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옷과 발우가 몸을 따르는 것은 마치 나는 새의 몸에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일 뿐인데, 들은 것이 적은 저 범부는 이것을 가지고 부처를 찬탄한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信施]을 받고도 다시 저축하기를 구하며 의복과 음식에 만족할 줄을 모르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자기의 생업을 경영하고 나무를 심어 귀신이 의지할 곳을 만들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시 방편을 지어 온갖 이양(利養)ㆍ상아(象牙)ㆍ잡보(雜寶)ㆍ높고 넓은 큰 평상과 온갖 무늬가 있는 비단ㆍ털로 짠 담요ㆍ돗자리ㆍ이불 등을 구하지만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다시 방편을 써서 자신을 치장한다. 소유(酥油)를 몸에 문지르고 향수에 목욕하며 향가루를 몸에 바르고 향수로 머리를 빗으며 아름다운 화만(華鬘)을 걸치고 눈을 감색으로 물들이며 얼굴을 문질러 장엄하고 깨끗한 고리를 차고 끈을 묶고 거울에 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보배 가죽신을 신고 새하얀 옷을 입으며 일산을 쓰고 총채를 잡으며 깃발로 장엄하게 꾸민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오로지 잡기를 즐겨 바둑ㆍ장기ㆍ8도(道)ㆍ10도ㆍ백천 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놀이를 스스로 즐긴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무익한 이야기만 한다. 왕들의 전쟁과 군마에 관한 일, 뭇 대신과 관리들이 수레나 말을 타고 드나들며 동산에서 유희하는 일을 말할 뿐이다. 또 눕고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일, 여자에 관한 일, 의복과 음식과 친척의 일을 이야기하며, 또 바다에 들어가 보물 캐는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무수한 방편을 써서 나쁜 직업으로 생활하고 아름다운 말로 아첨하며, 대놓고 서로 헐뜯고 이익으로써 이익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서로 다툼만 일삼는다. 혹은 동산에서, 혹은 욕지(浴池)에서, 혹은 당(堂)에서 서로 시비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경률(經律)을 알지만 너는 모른다. 나는 바른 길을 가지만 너는 삿된 길을 가며 앞의 것을 뒤에 붙이고 뒤의 것을 앞에 붙인다. 나는 잘 참지만 너는 잘 참지 못한다. 네가 하는 말은 모두 정직하지 않다. 만일 의심되는 것이 있거든 내게 와서 물으라. 내가 모두 답해 주리라.〉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다시 방편을 써서 스스로 심부름꾼이 되기를 구한다. 혹은 왕이나 왕의 대신ㆍ바라문ㆍ거사(居士)를 위해 심부름꾼이 되어 여기서 저기로 가고 저기서 여기로 오며 이 소식을 가져다 저 사람에게 주고 저 소식을 가져다 이 사람에게 주되 혹은 스스로 하기도 하고 혹은 남을 시켜서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다만 전쟁에서 싸우는 일만 익힌다. 혹은 칼이나 몽둥이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혹은 닭ㆍ개ㆍ돼지ㆍ염소ㆍ코끼리ㆍ말ㆍ소ㆍ낙타 따위의 짐승들을 싸움 붙이기도 하며, 혹은 남녀 간에 싸움 붙이기도 한다. 피리 소리ㆍ북소리ㆍ노래 소리ㆍ춤추는 소리 등 여러 가지 소리를 내고, 혹은 깃대에 오르고 거꾸로 떨어지는 재주 등 갖가지 재주부리기를 익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남녀의 길흉과 잘 생기고 못생긴[好醜] 관상을 보고 점치며 또 짐승의 관상까지 보면서 이익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귀신을 부르고 혹은 쫓으며 갖가지 기도와 무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모으기도 하고 능히 흩어지게도 하며 괴롭게도 하고 즐겁게도 한다. 또 능히 사람을 위해 태(胎)를 편안하게도 하고 태의(胎衣)가 밖으로 나오게도 하며, 또 능히 사람을 저주해 나귀로 만들기도 하고 또 사람을 귀머거리나 장님, 벙어리로 만들기도 한다. 또 여러 가지 기술을 보여주고 손을 모으고 일월(日月)을 향하는 등 온갖 고행을 하는 것으로써 이양을 구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사람을 위해 병을 치료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나쁜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혹은 선한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의방ㆍ침ㆍ뜸ㆍ약석(藥石)으로써 여러 가지 병을 고쳐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홍수나 화재를 방지하는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귀신의 주문을 외우기도 하며 혹은 찰리의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코끼리 주문, 지절(支節)의 주문, 집을 편안케 하는 부적과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혹은 불에 데고 쥐에게 물린 독을 풀어주는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혹은 죽고 사는 것을 점치는 글을 외우고, 꿈 풀이 하는 글을 외우며, 손금이나 관상을 보고 천문서를 외우며, 혹은 모든 소리에 대한 글을 외운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천기를 살펴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 곡식이 귀할지 천할지, 병이 많을지 적을지, 세상이 혼란스러울지 안온할지를 말해 준다. 혹은 지진ㆍ혜성ㆍ월식ㆍ일식을 말하기도 하고 혹은 별이나 일식ㆍ월식[星蝕]에 대해 말하기도 하며, 혹은 불식(不蝕)을 말하기도 하고 어느 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 능히 말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런 일이 없다.

다른 사문 바라문들은 남이 시주한 것을 먹으면서도 도에 방해되는 법을 행하고 삿된 방법으로 생활한다. 혹은 〈이 나라가 마땅히 이기고 저 나라는 그렇지 못하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저 나라가 마땅히 이기고 이 나라는 그렇지 못하리라〉고 말하기도 하며, 길흉을 점쳐 그 성쇠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문 구담은 그러한 일이 없다.’

모든 비구들이여, 이것은 계를 가지는 소소한 인연들인데 저 들은 것이 적은 범부들은 이것을 가지고 부처님을 찬탄한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과는 다른 법으로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오직 현성(賢聖)의 제자만이 능히 이 법을 가지고 여래를 찬탄한다. 어떤 것이 ‘깊고 미묘한 큰 광명의 법으로서 현성의 제자만이 능히 이 법을 가지고 여래를 찬탄한다’는 것인가? 모든 사문 바라문들이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本劫本見)과 말겁 말견(末劫末見)은 모두 62견에 들어가며,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은 다 6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대해서 갖가지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이 모두 이 6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모든 사문 바라문이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은 다 18견에 들어가고, 갖가지로 무수하게 나름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은 다 18견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대해서 갖가지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이 다 18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상론(常論)을 일으켜 말한다.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런 주장은 다 4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고 말하는 것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어떤 인연으로 본겁 본견에 대해서 상론(常論)을 일으켜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하고, 모두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定意三昧)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20번의 성겁(成劫)과 패겁(敗劫)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항상 존재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2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이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初見)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4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4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들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여 있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그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8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써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80번의 성겁과 패겁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동안 중생들은 늘지도 않았고 줄지도 않았으며 항상 모여 있고 흩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영원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한다. 민첩한 지혜 방편으로 관찰하여 ‘자세히 밝혔다’고 여기고는 자기 소견과 자기의 말재주로써 이렇게 말한다.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

이것이 제4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그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헤아리는데 이와 같은 일체 견해는 모두 4견에 들어가는 것이고,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는 이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持]과 이러한 고집[執]을 알고 또한 그 보응(報應)을 안다. 여래가 아는 것은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寂滅)을 얻는다. 수(受)의 집(集)ㆍ멸(滅)ㆍ미(味)ㆍ과(過)ㆍ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혀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며,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나와 세간은 반은 항상하고 반은 무상하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헤아리는데, 이러한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은 이런 때도 있었다. 이 겁(劫)이 처음으로 시작되던 때에 어떤 중생이 복(福)이 다하고 목숨[命]이 다하고 행(行)이 다해 광음천(光音天)에서 목숨이 끝나 허공의 범천에 태어났다. 그는 곧 그곳에서 애착심을 내어 다른 중생도 함께 그곳에 태어났으면 하고 원했다. 이 중생이 애착의 원을 일으킨 뒤에 다시 다른 중생이 목숨과 행과 복이 다해 광음천(光音天)에서 목숨을 마치고 범천에 태어났다. 그러자 먼저 범천에 태어난 중생은 곧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곳의 범(梵)이며, 대범(大梵)이다. 나는 저절로 있게 되었으며 아무도 나를 만든 자는 없다. 나는 모든 뜻을 알고 1천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自在)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나는 중생의 아버지로서 나 혼자 먼저 있었고 다른 중생은 뒤에 왔으니, 뒤에 온 중생은 모두 내가 조화로 만든 것이다.’

 

그 뒤에 온 중생들도 또 이렇게 생각했다.

‘저분은 대범이다. 저분은 스스로 생겨난 자이며 저분을 만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모든 뜻을 알고 1천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중생의 아버지로서 저분 혼자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우리가 있게 되었다. 우리들 중생은 저분이 조화로 만든 것이다.’

저 범천의 중생들은 목숨과 행이 다해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났다. 그들은 점차 자라나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닦았다. 그들은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을 따라 자기 자신의 본생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 대범천은 스스로 생겨난 자이며 저분을 만든 자는 없다. 모든 뜻을 다 알고 1천세계를 맡아 그 가운데서 자재하며 가장 존귀하고 잘 변화하며 미묘하기 제일이다. 저분은 중생의 아버지로서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저 범천이 조화로 만들었으므로 무상하여 변하고 바뀌며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初見)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중생은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게으름을 좋아하고 자주 우스갯소리를 하며 스스로 즐겼다. 그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즐기다가 몸이 매우 피로해 곧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잃음으로써 곧 목숨을 마치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점점 자라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가 도를 닦았다. 그는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본생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곳에 있는 다른 중생들은 자주 태어나지 않고 자주 우스갯소리를 하며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그곳에 있고 영원히 머물며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자주 우스갯소리를 한 까닭에 이 무상한 곳에 태어나 변하고 바뀌는 몸[變易法]이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중생은 이리저리 서로 쳐다보다가 곧 뜻을 잃고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마치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점점 자라나서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아 정의삼매에 들어갔다. 그는 삼매의 마음으로써 본래 태어났던 곳[本所生]을 기억하고는 곧 이렇게 말했다.

‘저 중생들은 이리저리 서로 쳐다보지 않았으므로 뜻을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곳에서 자주 서로 보았고 자주 서로 보고는 곧 뜻을 잃었기에 이 무상한 곳에 태어나 변하고 바뀌는 몸이 되었다. 나는 이것으로써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며, 이것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智慧)가 있어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관찰하고 자기의 지혜와 말재주로써 말한다.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4견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반은 영원하고 반은 무상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들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한 그 보응을 안다. 여래가 아는 바는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더라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그래서 수(受)의 집(集)ㆍ멸(滅)ㆍ미(味)ㆍ과(過)ㆍ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혀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며,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서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법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나와 세간은 끝[邊]이 있다, 끝이 없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가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끝이 있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끝이 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에 끝이 있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은 끝이 있으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초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끝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끝이 없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이 끝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은 끝이 없으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세간을 관찰하고는 ‘상방(上方)은 끝이 있고, 4방은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상방은 끝이 있고 4방은 끝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간이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인 줄을 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 ‘나와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가 있어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 관찰하고 자기의 지혜와 말재주로써 말한다.

‘나와 세간은 끝이 있는 것도 아니며 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4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나와 세간은 끝이 있다, 끝이 없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데, 그것들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견처(見處)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그 응보도 안다. 여래가 아는 바는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수(受)의 집(集)ㆍ멸(滅)ㆍ미(味)ㆍ과(過)ㆍ출요(出要)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며,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문이답(異問異答)2)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물을 때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다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선악에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나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선악에는 과보가 있는가, 과보가 없는가?〉

세간에는 널리 알고 많이 듣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항상 한적한 것을 즐기고 그때그때 하는 말이 미묘하고 자세하여 세상 사람들이 존중하며 능히 지혜로써 모든 소견을 잘 분별하는 사문 바라문이 있다. 만일 그런 자들이 나에게 깊은 뜻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어 저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저들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이런 대답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洲]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究竟道)를 삼자. 그가 만일 내게 물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초견이다.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세간의 여러 사문 바라문은 천안지(天眼智)와 타심지(他心智)로써 능히 먼 일을 본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가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를 보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능히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를 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세상이 있는지 다른 세상이 없는지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만일 내가 말한다면 그것은 곧 거짓말이 된다. 나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그러니 이것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자. 그가 만일 물으면 마땅히 이렇게 대답하리라.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며 이 일은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러한 소견을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

‘나는 어떤 것이 선(善)이고 어떤 것이 불선(不善)인가를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선인지 불선인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나는 곧 여기서 애착을 일으키고 애착으로부터 화를 낸다. 애착이 있고 성냄이 있으면 곧 수(受)3)가 생기게 된다. 나는 수를 없애고자 한다. 그러므로 집을 나와 행을 닦는다.’

그는 수를 미워하고 두려워하여 이것으로써 귀의할 데를 삼고 섬을 삼고 집을 삼고 구경도를 삼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물으면 그는 마땅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3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어리석고 어둡고 미련하여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말을 따라 이렇게 대답한다.

‘이 일은 이러하다. 이 일은 사실이다. 이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제4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을 하는데 그것은 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그로 인해 다른 질문, 다른 대답들을 하는데 그것은 다 4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들이다.

오직 부처만이 능히 이 견처와 이러한 가짐과 이러한 고집을 알고 또 그 응보도 안다. 여래가 아는 것은 또 이것을 넘어서지만 비록 알아도 집착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적멸을 얻는다. 수(受)의 집(集)ㆍ멸(滅)ㆍ미ㆍ과ㆍ출요를 알고 평등관으로써 남김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며,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어 현성의 제자들로 하여금 진실 평등하게 여래를 찬탄하게 한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어떤 사문 바라문은 본겁 본견에 있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다 2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은 무슨 일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하며, 이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가?

혹 어떤 중생4)은 생각도 없고 앎도 없다. 만일 그 중생이 생각을 일으키면 곧 목숨을 마치고 이 세간에 태어난다. 그가 점점 자라나면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그는 정의삼매에 들어 삼매의 마음으로써 본래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기억하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본래 없었는데 이제 갑자기 생겨났다. 이 세간은 본래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초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민첩한 지혜로 능히 잘 관찰한다. 그는 민첩하게 관찰하는 지혜로써 관찰하고 나서 자기의 지혜와 말재주로써 이렇게 말한다.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제2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본겁 본견에 대해서 ‘이 세간은 원인 없이 생겼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원인 없이 생겼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다 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 것들이다.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안다는 것은 또한 위의 내용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무수한 온갖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데 그것은 다 18견에 들어간다. 본겁 본견에 대해서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은 이 1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어떤 것이 그것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末劫末見)에 대해서 무수한 온갖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데 그것은 모두 44견에 들어간다. 또 말겁 말견에 대해서 무수한 나름대로의 주장은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말겁 말견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주장을 나름대로 펴는 것이며, 또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대해서 유상론(有想論)5)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16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서 상론(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다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상론을 내어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며, 또 모두 16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이와 같은 견해를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 몸도 있고 생각도 있는 존재[有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초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상론(想論)을 내어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은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없고 생각만 있는 존재[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을 수도 있고 몸이 없을 수도 있지만 생각은 있는 존재[有色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은 있는 존재[非有色非無色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도 있고 생각도 있는 존재[有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없고 생각만 있는 존재[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면서 생각은 있는 존재[有邊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非有邊非無邊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결같이 즐거움이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一向有樂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결같이 고통이 있고 생각이 있는 존재[一向有苦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즐거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有樂有苦有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고통스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면서 생각이 있는 존재[不苦不樂有想]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 가지 생각만 있는 존재[有一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있는 존재[有若干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생각이 적은 존재[少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한량없는 생각이 있는 존재[有無量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16견이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대해서 상론(想論)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16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無想論)6)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無想]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대해서 무상론을 일으키는 것은 이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대해 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있고 생각은 없는 존재[有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도 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無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기도 하고 몸이 없기도 하지만 생각은 없는 존재[有色無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 없는 존재[非有色非無色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고 생각이 없는 존재[有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도 없고 생각도 없는 존재[無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有邊無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없는 존재[非有邊非無邊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8견이다. 만일 사문 바라문들이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있어서 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부처님만이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非想非非想論)을 일으켜 이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비상비비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또 8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은 있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또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없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기도 하고 몸이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色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없는 것도 아니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非有色非無色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은 있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은 없으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有邊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어떤 자는 말한다.

‘나는 이 생을 마친 뒤에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존재[非有邊非無邊非有想非無想]로 태어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이것이 8견이다. 만일 사문 바라문이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비유상비무상론을 일으켜 세간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다 8견에 들어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다시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斷滅論)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 7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하여 말겁 말견에 있어서 단멸론을 일으켜 중생은 남김없이 단멸한다고 주장하고, 또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주장을 하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내 몸의 4대(大)와 6입(入)은 부모로부터 나서 젖을 먹고 길러지고 옷과 음식으로 자라나며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하여 반드시 없어져[磨滅]버린다. 그러므로 단멸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이 제1견이다.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나를 단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욕계천(欲界天)에서 남김없이 단멸한다. 그러므로 단멸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2견이다.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근(根)이 갖추어져 있는 화신(化身)은 색계(色界)에서 남김없이 단멸한다. 이것을 단멸이라 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공처(無色空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식처(無色識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불용처(無色不用處)에서 단멸한다.’

어떤 자는 말한다.

‘이것은 단멸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무색유상무상처(無色有想無想處)에서 단멸한다.’

이것이 제7단멸이다. 이것을 7견(見)이라고 한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이 중생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단멸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7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시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다른 깊고 미묘한 큰 법의 광명이 있다. 그것은 어떤 법인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말겁 말견에 대해서 현세의 니원론(尼洹論:涅槃論)을 일으켜 중생은 현세에 니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모두 5견에 들어간다. 말겁 말견에 대해서 현세에 니원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무슨 일로 인해 말겁 말견에 대해서 중생은 현세에 니원을 얻는다고 하며, 그 또한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현세에서 5욕(欲)을 마음대로 누린다. 이것이 내가 현세에 니원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제1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에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욕심[欲]과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각(覺)도 있고 관(觀)이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2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에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각(覺)과 관(觀)을 멸하고 안으로 기쁜 한마음[一心]이 되어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이 있는 제2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3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의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염(念)을 없애고 기쁨을 버리고 즐거움에 머무르며 한마음으로 바른 생각을 가진다. 그리하여 현성께서 말씀하신 몸의 즐거움을 스스로 알아 제3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현세의 니원이라고 한다.’

이것이 제4견이다.

 

또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현세의 니원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시 제일 미묘한 현세의 니원이 있다. 이것은 네가 모르는 것으로 오직 나만이 안다. 나는 즐거움도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걱정과 기쁨은 이미 멸하였으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바른 생각으로 청정한 제4선에 들어간다. 이것을 첫째가는 니원이라 한다.’

이것이 제5견이다. 만일 사문 바라문들이 말겁 말견에 대해서 현세의 니원론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5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말겁 말견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마음대로 주장하지만 모두 44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이 모든 견처(見處)를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이 여러 가지로 무수하게 마음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은 다 이 62견에 들어가고, 여러 가지로 무수하게 마음대로 주장하는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은 62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직 여래만이 이러한 견해들을 아는데, 그 내용은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상론(常論)을 세워 ‘나와 세간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저 사문 바라문들은 여기서 지혜를 내는데, 그것은 이른바 다른 믿음ㆍ다른 욕심ㆍ다른 들음ㆍ다른 인연ㆍ다른 깨달음ㆍ다른 소견ㆍ다른 선정[定]ㆍ다른 인식[忍]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지혜를 내고는 널리 펴 나타내는데 이것을 곧 이름하여 수(受)라고 한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상론을 세워 ‘세간은 항상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수(受)의 연을 인하여 애착을 일으키고 애착을 내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해 그만 애착에 물들고 애착에 굴복한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다.

여러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에 대해서 상론을 세워 ‘세간은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들이 접촉[觸]의 인연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접촉의 인연을 떠나서 그런 주장을 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서는 현세의 니원론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은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있어서 각각 본 대로 말하는데, 그것은 다 62견에 들어간다. 각각 그 소견을 따라 말하는 것은 모두 그 가운데 의지하고 그 가운데 들어있어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마치 노련한 어부가 섬세한 그물로 작은 못을 덮은 것과 같다. 마땅히 알라. 못 가운데 있는 모든 고기들은 다 그물 속에 들어가고 피할 곳이 없으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문 바라문들도 그와 같다. 본겁 본견과 말겁 말견에 대한 갖가지 주장은 다 62견에 들어가 벗어나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6촉(觸)의 발생[集]ㆍ소멸[滅]ㆍ맛[味]ㆍ허물[過]ㆍ벗어남[出要]에 대해서 여실히 안다면 그것은 곧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저들의 모든 소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여래가 스스로 생사가 이미 다한 것을 알면서도 그 몸을 가지고 있는 까닭은 모든 하늘과 사람을 복되게 하고 제도하기 위함이다. 만일 몸이 없다면 곧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들은 믿을 곳이 없을 것이다. 마치 다라수(多羅樹)는 한 번 끊어내면 다시는 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그와 같이 이미 생사를 끊어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법을 연설하실 때 대천(大千)세계는 세 차례나 반복해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그때 아난은 부처님 뒤에서 부채를 들고 부처님을 부쳐드리고 있다가 오른 팔을 드러내고 길게 꿇어앉아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법은 참으로 심오합니다. 마땅히 무엇이라 이름하고 어떻게 받들어 가져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 경을 이름하여 의동(義動)ㆍ법동(法動)ㆍ견동(見動)ㆍ마동(魔動)ㆍ범동(梵動)7)이라 하라.”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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