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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2권
반랄밀제 한역
현성주 번역
이 때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태연해진 가운데 생각해 보았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인연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그림자를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야 여래를 만나서 깨닫고 보니, 마치 젖 잃은 아기가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아난은 대중과 함께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몸과 마음에서 진실과 망상의 허와 실과 현재의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의 이치를 드러내시고, 두 가지의
바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를 원했다.
이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을 해결하여 불생멸의 이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겠습니까. 지금 이 대중 가운데 번뇌가 있는 이들도 모두 다 듣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현존하니 이제 또 네게 물어보리라. 대왕의 그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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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말했다.
"저는 지금 이 몸이 끝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멸할 줄 아는가."
왕이 말했다.
"저의 이 무상(無常)하게 변하여 무너지는 몸이 비록 이전에 멸한 적은 없으나, 생각마다 옮기고 달라져서 계속 새롭게 변하여 멈추지 않고, 불에 타는 땔감이 재가 되듯이 점점 스러져 사라지며 쉬지 않고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보니, 이 몸은 앞으로 결코 멸하여 사라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이미 쇠약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얼굴 모습은 동자 때와 얼마나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피부와 살갗이 부드럽고 윤택하였으며, 더 자랐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여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나이로 거의 쇠약한 상늙은이[衰耄]가 다 되었으니, 형색은 말라서 초췌하고 정신은 멍하여 혼미하며, 머리는 하얗고 얼굴은 쭈그러져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텐데, 어떻게 혈기 충만한 젊은 시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몸과 얼굴은 한꺼번에 쇠약하지 않았으리라."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변하여 달라진 모양이 가만히 옮겼으니, 저는 참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寒暑]의 옮겨 흐름과 함께 점점 이렇게 늙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제 나이 스무 살 때는 비록 젊은 나이라고 하나, 얼굴 모습은 이미 이전 열 살 때보다 늙었으며, 서른 살 때는 스무 살보다 늙었으며, 지금의 예순두 해를 보낸 나이로 쉰 살 때를 돌아보면, 쉰 살 때가 훨씬 건장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가만히 옮겨온 일을 대강 보고, 비록 이렇게 폭삭 늙었다고 하였으나, 그 동안 흘러 바뀌어 온 기간을 그저 10년씩 잡은 것에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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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습니다.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그 변함이 어찌 10년 20년뿐이겠습니까, 실은 해마다 변했습니다. 어찌 오직 해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달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어찌 단지 달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날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좀더 세밀하게 곰곰이 살펴보면, 찰나마다 생각마다 변하여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몸이 마침내 변하여 없어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변화하고 옮기고 바뀜이 멈추지 않음을 보고 그 몸이 끝내 멸할 줄 안다'고 했는데, 그대는 멸할 때에도 몸 가운데 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줄을 아는가."
바사닉왕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참으로 그 이치를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불생멸의 성품을 보여주리라. 대왕이여, 그대는 몇 살 때 처음으로 항하의 강물을 보았는가."
왕이 말했다.
"제 나이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기바천(耆婆天) 사당(祠堂)을 참배[謁]할 때, 이 강물을 건너면서 바로 항하의 강물인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하기를 '스무 살 때는 열 살 때보다 늙었고, 내지 예순 살은 쉰 살보다 늙었으며, 또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찰나마다 생각마다 옮기고 변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처음 세 살 때 본 이 강물을 열세 살이 되어 본 그 강물에 비하면 어떻게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 살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금년 예순 두 살이 되어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와 쭈그러진 얼굴을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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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얼굴도 분명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졌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 정기와 예전의 동자 때 강물을 보는 정기에도 따로 동자와 늙은이가 있겠는가."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이 보는 정기의 성품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것은 변할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 속에 생사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저 말가리(末伽梨)들의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가."
왕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몸이 죽은 뒤에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합장한 채 길게 끓어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저희들에게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일을 행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번뇌를 씻어주옵소서."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켜 보이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모다라(母陀羅: 印, 封, 結印, 手印) 손을 보아라. 이 손의 모양을 '바로'라고 하겠느냐, '거꾸로'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양을 '거꾸로'라고 하겠으나,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세상 사람들이 이 모양을 '거꾸로'라고 한다면, 어떤 모양을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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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팔을 세우셔서 도라면(兜羅綿)손을 위로 올리시고 허공을 가리키신다면 '바로'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곧 팔을 세우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顚倒]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더 잘못 보고 있느니라. 분명히 알라. 너의 그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다 아는 지혜의 몸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몸이라고 한다. 네 몸을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아라. 네 몸을 여래의 몸에 비하여 뒤바뀌었다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아난은 대중과 함께 몸과 마음의 뒤바뀐 곳이 어딘지 몰라서 치켜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멍하게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부처님께서 자비한 마음을 내어 아난과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色]과 마음[心]과 모든 인연과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心所使]과 온갖 인연 경계의 법[所緣法]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모양'이라고 설해왔느니라. 네 몸과 마음은 다 이렇게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정밀하고 심오한 마음 가운데 나타난 현상인데, 어째서 너희들은 본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보배처럼 밝고 묘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이냐.
미혹한 어둠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 가운데서 어둠이 맺혀 색(色)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몸으로 여겼으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는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모양을 심성(心性)으로 삼았느니라.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 마음으로 여겨서는 헷갈려 몸[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 안으로 색신(色身)과 밖으로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가 온통 다 묘하고 밝은 참 마음 가운데 물체임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오직 한 물거품의 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 바닷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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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瀛渤]를 끝까지 다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아래로 내린 손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니, 이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느니라."
아난은 부처님께서 가련하게 여겨 구해주신 깊은 가르침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수(叉手)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의 이와 같은 묘음(妙音)을 받들어서 묘하고 밝은 마음이 원래 원만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자리[心地]임을 깨달았으나, 제가 지금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깨달을지라도, 현재 인연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진실로 우러러 볼지라도 단지 이 마음을 얻을 뿐이니, 아직은 감히 본원(本元)의 심지(心地)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원만한 법음[圓音]을 베푸시어, 이 의혹의 뿌리를 뽑으셔서 더없이 높고 바
른 도[無上道]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히려 인연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이 법도 인연일 뿐, 법의 본성을 얻은 것이 아니니라.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만일 손가락을 보고 달 자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어찌 달만 잃었겠느냐. 손가락도 잃었느니라. 왜냐하면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만 잃었다고 하겠느냐. 밝음과 어둠도 모른다고 하리라. 왜
냐하면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로 여겨서, 밝고 어두운 두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만일 내 설법소리를 분별하는 작용으로 네 마음을 삼으려면, 그 마음은 마땅히 소리의 분별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한다. 비유하면 여정(旅亭)에 기숙(寄宿)한 나그네는 잠시 머물다가 이내 떠나서 끝내 상주(常住)하지 않으나, 여정을 맡은 사람은 전혀 갈 곳이 없으니 여정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진실한 네 마음이라고 한다면, 갈 데가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소리를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냐. 어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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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분별하는 마음만 그렇겠느냐, 나의 용모를 분별하는 마음도 온갖 색상(色相; 三十二相 八十種好)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니라. 이렇게 나아가 분별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면,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므로, 구사리(拘舍離)들은 이 이치를 모르고 명제(冥諦)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인연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마음[心性]은 각각 인연을 따라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어찌 주인이 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만일 제 심성(心性)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은 어째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그 이치를 설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가 나를 볼 때 그 보는 정기[見精]는 밝은 근원이다. 이 보는 정기가 비록 미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눈을 눌러 생긴 곁 달과 같으며,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니다. 너는 자세히 들어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자리가 없는 까닭을 보여주리라.
아난아, 이 큰 강당이 동쪽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하늘에 해가 뜨면 밝은 빛을 보고, 그믐의 한밤중에 구름이 잔뜩 끼면 캄캄한 어둠을 보며, 문과 창틈에서는 통함을 보고, 담과 지붕에서는 막힘을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여러 인연을 보고, 텅 빈 곳에서는 두루 공(空)한 성질을 보며, 안개에 묻혀 내리는 흙비의 모양에서는 어둠에 쌓인 티끌을 보며, 날씨가 맑게 개어 먼지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맑은 기운을 보리라.
아난아, 너는 이 변화하는 모양들을 다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 그 모양들을 본래 원인한 자리로 각각 돌려보내리라.
본래 원인한 자리는 어느 곳이겠느냐.
아난아, 이 여러 변화하는 모양 가운데, 밝음은 해로 돌려보내리라. 그 까닭은 해가 없으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밝은 원인은 해에 속했으니, 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둠은 그믐의 한 밤중에 돌려보내고, 통함은 문과 창틈으로 돌려보내며, 막힘은 담과 지붕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인연은 분별로 돌려보내며, 텅 빈곳은 허공으로 돌려보내고, 안개 쌓인 흙비는 티끌로 돌려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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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맑은 기운은 개인 날씨로 돌려보내리라.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이 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너는 이 여덟 가지를 두루 다 본다. 그 두루 다 보는 정기의 밝은 성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
만일 밝음으로 돌려보낸다면 밝지 않을 때는 어둠을 보지 못해야 하리라. 비록 밝고 어두운 것들은 가지가지 차별이 있으나, 보는 정기는 차별이 없느니라.
돌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네 마음은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하나, 너 스스로 미혹하여 본성을 잃고 윤회하면서 언제나 생사 가운데 잠겨 흘러 다니니 여래는 불쌍하다고 하느니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비록 이 보는 성품은 돌려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어떻게 해야 이 보는 성품이 저의 참 성품이란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물어 보리라. 너는 아직 번뇌 없는 청정한 경지[無漏淸淨]를 얻지 못했으나, 나의 신통력[神力]으로 초선천(初禪天)을 걸림 없이 보았다. 아나률(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열매처럼 보고, 보살들은 백 천의 세계를 보며, 시방 여래는 티끌처럼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다 볼 수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볼지라도 한 치[分寸]에 지나지 않는다.
아난아, 내가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이 머무는 궁전을 보았을 때, 중간에서 물과 육지와 허공에 다니는 온갖 것을 두루 다 보았다. 거기에 비록 어둡고 밝은 가지가지 형상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앞 경계의 구분으로서 걸리고 막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너는 여기에서 자타(自他)를 분별해 보아라. 내가 이제 너에게 보는 작용 가운데 무엇이 나 자체인지 무엇이 다른 물상인지를 가려내리라.
아난아, 네가 보는 능력을 다하여 일월궁(日月宮)으로부터 살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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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또 칠금산(七金山)까지 자세히 살펴보아라. 비록 가지가지 빛깔은 다르나, 역시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이렇게 점차 다시 뜬구름과 나는 새들과 부는 바람과 날리는 티끌과 숲과 나무와 산과 내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짐승들을 보아라. 모두 다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아난아, 이 멀고 가까운 온갖 물체의 성질은 비록 다를지라도, 너의 보는 정기는 한결같이[同] 청정하게 보느니라. 온갖 종류의 물체에는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으니, 이 보는 정기의 묘한 밝음이 진실한 너의 보는 성품이니라.
만일 이 보는 작용이 물체라면, 너는 나의 보는 작용도 보아야 한다.
만일 같이 보는 것으로 나의 보는 작용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너는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못 보는 것이냐.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고 한다면, 자연히 저 보지 않는 모양이 아니니라.
만일 내가 보지 않는 자리를 못 본다면 자연히 물체가 아니니, 어찌 너 자신이 아니겠느냐.
또 네가 이제 물체를 볼 때 너는 이미 물체를 보았으니, 물체도 너를 보아야 하리라. 그러면 보는 자체의 성질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너와 나와 온갖 세상은 제자리의 질서[安立]를 이루지 못하리라.
아난아, 만일 네가 나를 볼 때 바로 너의 보는 작용이요, 나의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보는 성품이 두루 원만한 자체는 너 자신이 아니고 누구라고 하겠느냐. 어째서 너의 진실한 성품이 너의 성품으로서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하여, 나를 상대로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성품이 틀림없이 저 자신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의 승장보전(勝藏寶殿)을 보느라고 일월궁(日月宮)에 있었을 때는 이 보는 성품은 두루 사바세계에 원만하다가, 정사(精舍)로 돌아왔을 때는 단지 가람(伽藍)만 보였으며, 마음 닦는 당실[淸心戶堂]에 있을 때는 처마와 행랑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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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이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본래 한 세계에 두루 원만하다가 지금 방안에서는 오직 한 방에만 가득 차는 것입니까. 이 보는 성품이 큰 것을 움츠려 작아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 끊어지는 것입니까. 저는 지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니 부디 넓은 자비를 내리시어 설하여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다거나 작다거나 안이라거나 밖이라고 하는 모든 일의 작용[事業]은 각기 앞 경계에 달려 있을 뿐이니, 보는 성품이 펴진다거나 움츠린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면 모난 그릇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일과 같다. 내가 또 너에게 묻겠노라. 이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정해진 모남이겠느냐, 정해진 모남이 아니겠느냐. 만일 정해진 모남이라면 달리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그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하리라. 만일 정해진 모남이 아니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한다. 네가 말한 '이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뜻의 내용[義性]이 이러하니, 무엇이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둥글고 모남이 없는 데로 들어가게 하려면, 단지 모난 그릇만 치우면 그만이다.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더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난 모양을 치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네가 질문한 대로 방에 들어갔을 때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졌다면, 고개를 들어 해를 쳐다볼 때는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춰야 하겠느냐.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졌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는 어째서 이은 흔적이 없느냐.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온갖 중생들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자기를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고 물체를 따라 구르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만일 물체를 굴릴 수 있다면, 여래와 같이 몸과 마음이 뚜렷이 밝아서,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 털 속에 두루 시방국토를 머금어 들일 수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정기가 틀림없이 나의 미묘한 성품이라면, 이[31 / 252] 쪽
미묘한 성품은 지금 바로 제 앞에 있습니다. 이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분명 나의 진실한 성품이라면,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으나, 저 보는 정기는 따로 제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일 참으로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제 마음이라면, 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였으니, 보는 성품이 실제로 나이고, 이 몸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좀 전에 '물체도 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큰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지금 네가 말한 보는 정기가 네 앞에 있다고 한 뜻은 진실하지 않다. 참으로 네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다면, 이 보는 정기는 이미 장소가 있을 것이니, 그 장소를 가리켜 보일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에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를 두루 다 보고 있으니, 너는 이제 내 사자좌(師子座) 앞에서 손을 들어 이 가지가지 모양에서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며, 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 모양이 될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그 보는 정기가 분명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 어느 것이 이 보는 정기냐.
아난아, 마땅히 알라. 만일 허공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허공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물상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물상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을 헤치고 벗겨서, 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저 온갖 물상들을 보듯 분명하여 의혹이 없도록 나에게 가리켜 보여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지금 이 겹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 위로 해와 달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과 눈가는 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다 가리켜도 모두 이 물체일 뿐, 보는 정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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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처음 배우는 성문이어서 그렇다고 하나, 심지어 보살들의 큰 지혜로도 온갖 물상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이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다면, 네가 가리킬 물상 안에는 보는 정기가 없으리라. 한 번 더 네게 부탁한다. 너는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으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 다른 모양에서 네가 가리켜 낼 보는 정기가 없다면, 너는 또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무엇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밝혀보아라."
아난이 말했다.
"저는 실재로 이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를 보겠으며,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라면 어찌 나무라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또 사유(思惟)해 보니,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정기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자 아득하여, 이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 일시에 놀라면서,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여래께서 그 넋이 변하여 놀란 줄을 아시고 가련하게 여겨 아난과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의 말은 진실한 말이며, 진리그대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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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이며, 거짓이 없는 말이니, 말가리(末伽黎)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네 가지 희론[四種不死矯亂論議]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哀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때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이 여래께서 밝히신 정교한 보는 작용이 색과 공인지[是], 아닌지[非是]에 대한 두 가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앞에 인연하는 색(色)과 공 등의 모양이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라면 반드시 가리켜 보일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볼 수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중은 지금 이 뜻이 돌아간 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고 있을 뿐, 옛날부터 바른 근성[善根]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베푸셔서, 이 온갖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는 원래 무엇이 길래, 그 중간에 그렇다고도[是] 할 수 없고 그렇
지 않다고도[非是]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문수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 여래와 뛰어난 보살들이 스스로 머문 삼마지(三摩地) 가운데는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와 생각하는 모양들은 허공 꽃과 같이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데, 어찌 이 가운데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있겠느냐.
문수여, 너에게 묻겠노라. 너 그대로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은 문수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문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은 문수다라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문수다라고 한다면, 바로 두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변함없는 문수이니, 이 가운데 참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두 모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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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과 허공과 온갖 경계도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고 더없이 높은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허공과 보고 듣는 작용으로 변했으니, 마치 곁 달[第二月]을 보면서 어느 것은 달이고, 또 어느 것은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수여, 단지 참 달 하나뿐이니,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보는 정기와 경계[塵]를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작용은 허망한 생각이니, 그 가운데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이기 때문에 가리켜 밝힐 수 있다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경계에서 너를 벗어나게 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覺緣]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梵志)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에게 이 뜻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설하나, 내가 말한 인연은 저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살펴보니, 깨달음의 성품은 자연으로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멀리 일체 허망한 뒤바뀜을 벗어났으므로, 인연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야만 온갖 사견(邪見)에 들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성
품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줬는데,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과 헷갈리는 것이냐.
아난아, 만일 틀림없이 자연이라면 '저절로[自]'가 반드시 분명하여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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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체[自然體]가 있어야 한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게 보는 작용에서 무엇으로 자체(自體)를 삼겠느냐. 이 보는 작용을 밝음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어둠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빈곳[空]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막힘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또 만일 빈곳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갖 어둠 등의 모양을 자체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겨 없을 텐데 어떻게 밝음을 보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이제 인연으로 생긴다고 밝히려 하나, 제 마음은 오히려 아직 분명하지 못해서 여래께 묻습니다. 이 뜻은 어떻게 해야 인연의 성품[因緣性]에 부합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노라. 너는 지금 보는 작용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하니, 이 보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만일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곳과 막힘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예와 같다.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은 또 밝음을 연(緣)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만일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빈곳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밝음과 어둠을 연하는 경우도 빈곳과 막힘의 예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인연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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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닌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가운데[無是非是], 일체의 모양을 떠나서 일체의 법과 일치하느니라. 너는 어째서 이 가운데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하는 온갖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이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듯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인데,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비구들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에 네 가지 연(緣)을 갖췄으니, 이른바 빈곳을 인연하고 밝음을 인연하고 마음을 인연하고 눈을 인연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을 뿐,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을 설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또 네게 묻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보이면 보는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밝음이 없을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분명 어둠을 본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을 뿐이지, 어째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어둠 속에 있을 때 밝음을 못 본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밝은 데 있으면서 어두운 모양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두 모양을 함께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빼앗아 바뀔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밝음과 어둠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분명히 알라. 밝음과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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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둘 다 보는 것인데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곳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빈곳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네가 물은 네 가지 뜻이다. 너는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는 정기를 볼 때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느냐.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모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곰곰이 잘 생각하여 묘한 보리의 길[妙菩提路]에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과 화합하지 않는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 여기에 마음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이제 다시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지금은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넓으신 사랑으로 큰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마음을 밝혀 맑히는 법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거룩한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 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와 모든 삼마제(三摩提)와 묘한 수행의 길[妙修行路]을 설하시기 위하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 채웠을 뿐, 사마타(奢摩他)의 미세하고 심오한 관조의 지혜[微密觀照]는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너를 위해서 분별하여 열어 보이고, 또 장래의 번뇌에 얽힌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菩提果]를 얻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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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아, 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두 가지 뒤바뀌어 분별하는 허망한 보는 작용을 따라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여 바로 그 업으로 바퀴 돌 듯 구르기 때문이니라.
두 가지 보는 작용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이요. 둘째는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이다.
개별 업(別業)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삼 병[赤眚]이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에서 남달리 5색이 둥글게 겹친 등 무리를 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밤 등불에 밝게 나타난 등 무리[圓光]를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일 이것이 등불의 색이라면 삼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등 무리를 보지 못하는데, 어째서 오직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이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만일 보는 작용의 빛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빛이 되었는데, 저 삼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등 무리는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또 아난아, 만일 이 등 무리가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볼 때에도, 당연히 등 무리가 나와야 하며,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분명 눈이 보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은 눈으로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빛은 실제로 등에 있으며, 보는 작용의 병이 등 무리가 되었느니라.
등 무리와 보는 작용이 다 삼 병일지라도, 삼 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끝내 등 무리를 놓고 등 탓이다 보는 작용 탓이다라고 말하거나, 그 가운데서 등 탓이 아니요 보는 작용 탓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곁 달[第二月]은 달 자체도 아니고 달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곁 달은 눈을 눌러 생겼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눈을 눌러 생긴 곁 달의 근원을 두고 '달 모양이다 달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
보는 작용과 보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벗어났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등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삼 눈병으로 생겼는데, 이제 무엇을 이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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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탓이다 보는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어찌 더욱이 '등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려고 하겠느냐.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에는 큰 바다를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만 3천 섬[洲]이 있는데, 한 복판의 대륙[大洲]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한데 묶어 세어 보면 2천 3백 개의 큰 나라가 있느니라. 그 나머지 작은 섬[小州]은 여러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3백 나라 2백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나라 두 나라로부터 서른 나라 마흔 나라 쉰 나라까지 있기도 하다.
아난아, 만일 이 중 어느 한 작은 섬에 단 두 나라만 있는 데서, 오직 한 나라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나쁜 인연에 물들었다면[感],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된다. 혹은 두 해를 보기도 하고 두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暈], 월식과 일식[適], 해의 귀걸이[珮玦], 살별[彗星], 사방으로 뿔 돋친 별[孛星], 빗겨 나는 별똥 별[飛星],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流星], 해를 등진 무지개[負耳],
암수의 쌍무지개[虹蜺]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 모양은 단지 이 국토 중생들만 볼 뿐이며, 저 국토 중생들은 본래 본 바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 일을 앞뒤로 맞춰서 밝혀보리라. 저 중생이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으로 본 등빛에 나타난 등 무리가 비록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났을지라도, 결국 저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뤄졌으니, 삼 병은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나타난 모양일 뿐, 빛 자체에서 만들어진 모양이 아니다.
그러나 삼 병을 보는 자체는 결국 보는 자체의 허물이 없느니라.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작용에 견주어 보면, 모두 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병으로 이뤄진 모양이니라.
보는 작용[見]과 보는 작용의 인연[見緣]이 앞에 나타난 경계인 듯하나, 원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으로 허망하게 인연 대상을 보는 삼 병이니, 깨닫고 보는 것이 곧 삼 병이지만, 본각(本覺)의 밝은 마음으로 인연을 깨치는 것은 삼 병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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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깨달아야 할 삼 병을 깨달으면, 이 깨달음은 삼 병 가운데 있지 않느니라. 이것이 참으로 보는 정기를 보는 진실한 봄[見見]이니, 어찌 깨닫고 듣고 알고 보는 허망한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 자신을 보고 모든 세간의 온갖 중생을 볼지라도, 다 보는 작용의 삼 병이요, 삼 병을 보는 진실한 자체가 아니다. 저 보는 작용의 정밀하고 진실한 성품은 삼 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작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저 중생들이 본 공동 몫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을, 저 허망하게 본 개별 업의 한 사람에 견주어 보면, 눈에 삼 병 걸린 사람은 저 한 나라와 같다. 또 저 한 사람이 본 등 무리는 삼 병으로 허망하게 생겼으며, 이 공동의 몫으로 본[衆同分] 불길한 모양[不祥]은 공동으로 보는 업[同見業]의 전염병처럼 나쁜 기운[瘴惡]에서 일어났으니, 모두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허망에서 생겼느니라.
염부제(閻浮提)의 3천주(洲) 가운데 네 큰 바다를 겸한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국토와 중생들을 견주어 보면, 다같이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 화합하여 허망하게 죽는 것이니라.
만일 모든 화합하는 인연과 화합하지 않은 것을 멀리 벗어날 수 있다면, 온갖 나고 죽는 원인을 멸하여 없애고,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이요, 청정한 본래 마음인 본래 깨달음이 영원히 머물게 되리라.
아난아, 네가 비록 앞서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아난아, 내가 이제 또 앞 경계를 들어 너에게 물어보리라. 너는 지금도 오히려 일체 세상의 망상으로 화합한 온갖 인연의 성질을 가지고 스스로 보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의혹하고 있느니라.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어울렸느냐, 어둠과 어울렸느냐. 통함과 어울렸느냐, 막힘과 어울렸느냐.[41 / 252] 쪽
만일 밝음과 어울렸다면 또 너는 밝은 것을 보아라. 밝은 것이 바로 눈앞에 닿아 있으니 어느 곳에 보는 정기와 섞였느냐. 보는 정기[見]와 밝은 모양[相]은 가려낼 수 있을 테니, 섞인 것은 어떤 형상이냐.
만일 밝은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밝은 모양을 보겠느냐. 만일 밝음이 곧 보는 정기라면 어찌 보는 정기 자체를 보겠느냐.
만일 분명 보는 정기가 원만하다면 어느 곳에 밝음과 어울리겠으며, 만일 밝음이 원만하다면 당연히 보는 정기와 어울리지 못하리라.
보는 정기는 분명 밝음과 다르므로, 섞이면 저 성품이 밝다는 명분[名字]을 잃게 되며, 섞여서 밝은 성품을 잃었으니, 밝음과 어울린다는 말은 옳지 않다.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린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또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합하였느냐, 어둠과 합하였느냐. 통함과 합하였느냐, 막힘과 합하였느냐.
만일 보는 정기가 밝음과 합하였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모양은 이미 사라져서, 이 보는 정기는 온갖 어둠과 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을 볼 때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했다 하며, 밝음이 어둠이 아닌 줄을 알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한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사유(思惟)해보니 이 미묘한 깨달음의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와 마음으로 생각하는 작용[心念慮]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또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내가 다시 네게 묻겠노라. 이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어둠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통함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막힘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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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邊畔]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고 어디까지가 보는 정기의 경계이냐. 또 보는 정기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느냐.
아난아, 만일 밝은 경계 안에 보는 정기가 없다면, 서로 닿지 않아서 그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경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리는 예와 마찬가지다.
또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하지 않았느냐. 어둠과 합하지 않았느냐. 통함과 합하지 않았느냐. 막힘과 합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합하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이 그 성질과 모양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귀와 밝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아도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히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하는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너는 오히려 아직도 일체 실속 없이 뜬 경계에서 환술(幻術)처럼 변화하는 온갖 모양이, 바로 그 곳에서 생겨났다가 그 곳을 따라 사라져버림을 밝히지 못하여, 허망한 환영(幻影)을 모양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진실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음(陰)과 6입(入)과 12처(處)에서 18계(界)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난다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지만, 단지 이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옴이 본래 여래장(如來藏)으로서, 영원히 머물러 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고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眞如)의 성품임을 잘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성품의 진실하고 영원불변한 가운데서는 아무리 가고 옴과 미혹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 없느니라.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허공을 볼 때, 오직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맑게 개인 빈곳만을 보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바로 뜬눈이 피로해지면,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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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따로 어물거리는 헛꽃을 보기도 하고, 또 일체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온갖 어물거리는 헛꽃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드나듦이 있다면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만일 빈 것이 아니면, 스스로 그 꽃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눈에서 나왔다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이 꽃의 성질이 눈에서 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보는 작용이 있어야 하며, 만일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에서 꽃이 되었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한다. 만일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하리라. 또 꽃을 볼 때도 눈에는 당연히 가린 것이 없는데, 어째서 맑은 허공을 보아야만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음(色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고 온 뼈마디가 고루 화평하여 살아 있다는 것도 잊고 마음에 어기고 따르는 일도 없는 가운데,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빈다면, 두 손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受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오지도 않고 손바닥에서 나오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은 촉감을 잘 아는데 어째서 몸에는 촉감이 없느냐.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닿게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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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며,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쳤을 때 손바닥이 알았다면, 떼었을 때는 촉감이 들어갈 것이니, 손목과 팔목의 골수(骨髓)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蹤迹)을 느껴야 한다. 또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을 알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한 물체가 몸 속을 오고 가는 것이니, 어째서 마주 합하기를 기다려서 알아야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수음(受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벼랑을 밟는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껄끄럽고 시쿰한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想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난아, 시다는 말에서 생긴 침은 매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침이 매실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매실 자체가 말해야 하는데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일 입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어찌 꼭 귀를 기다려 듣겠느냐. 만일 귀로만 듣는다면 이 침은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높은 벼랑을 밟아 오른다는 생각도 매실 비유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상음(想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세찬 흐름이 물결을 서로 이어 흐르면서 앞뒤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行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흐름의 성질은 허공을 근거로 생기지도 않고, 물을 근거로 있지도 않으며, 물의 성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을 근거로 생긴다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은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 세계는 자연히 온통 물 속에 빠져 잠기리라.
만일 물을 근거로 있다면 이 세차게 흐르는 성질은 당연히 물이 아니니, 물의 소유한 모양[所有相]이 있으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보여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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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만일 그 흐름이 물의 성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는 분명 물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
만일 허공과 물을 떠나서 흐름이 따로 있다면 허공은 바깥이 있지 않으며, 물을 떠나서[水外]는 흐름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행음(行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빈가병(頻伽甁)을 취하여 두 구멍을 막아서 그 속에 공기[空]를 가득 채우고 천리의 먼 길을 행하여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식음(識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허공은 저 곳에서 오지도 않고 이 곳에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저 곳에서 왔다면 그 병 속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니, 그 병이 있었던 자리의 허공은 마땅히 조금 적어져야 한다. 만일 이 곳에서 들어간다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식음(識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출처 http://abc.dongguk.edu/ebti/c2/sub1.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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