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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상권



마명(馬鳴) 지음

실차난타(實叉難陀) 한역

김월운 번역




다함이 없는 시방 세계에서
끝없이 큰 불사를 지으시되
한없고 자재하신 지혜로써
세간을 구호하시는 님과

그리고 그 분의 본체이며 형상이신
무아의 말씀과 이치인 법과
끝없는 덕을 갖추신 승보로서
부지런히 정각을 구하시는 님께 귀의하옵고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의심을 끊고 삿된 집착 버리며
믿음을 일으켜 부처님의 종자를 잇게 하고자
제가 지금 이 논을 지으려 하옵니다.

대승의 맑은 믿음을 일으켜 모든 중생의 어두운 의혹과 삿된 집착을 끊고 불종성(佛種性)을 이어서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논을 짓는다.
어떤 법이 대승의 믿음[信根]을 내는데 이러한 까닭을 설명해야 한다. 설명에는 다섯 구분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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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작인분(作因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신분(修信分)이요, 다섯째는 이익분(利益分)이다.

이 가운데의 작인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상(總相)이니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함이요, 이양(利養) 등을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적인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에서 물러나지 않고 대승법을 감당해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약한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일으켜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다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마음을 조복하여 삼독(三毒)을 여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섯째는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지관(止觀)을 닦아 범부나 소승들의 허물을 물리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일곱째는 대승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생각하여 부처님 앞에 태어나서 끝내 대승의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七為令眾生於大乘法如理思惟得生佛前究竟不退大乘信故)
여덟째는 대승을 믿고 좋아하는 이익을 드러내 보여 모든 중생[含識]에게 권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해 돌아오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이 모든 말씀과 이치[義]는 대승경전에 이미 갖추어 있다. 그러나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와 욕구가 같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반연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이 논을 짓는다. 이는 다시 무슨 뜻인가?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엔 교화를 받을 이의 근기가 뛰어나고 부처님의 모습과 마음도 수승하여 한 음성[一音]으로 끝없는 이치를 열어 연설하기 때문에 논이 필요치 않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엔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경을 조금만 보고도 많은 이치를 이해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경을 널리 보고서야 바르게 이해하고, 어떤 이는 자신에게 지혜의 힘이 없어 광대한 논설을 두려워하고 간략한 논이 광대한 이치를 품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바른 수행을 하는 이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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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마지막 부류의 사람을 위한 까닭에 여래의 가장 수승하고 심히 깊고 끝없는 이치를 묶어서 이 논을 짓는다.

어떤 것이 입의분인가?
마하연(摩訶衍)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법(有法)1)과 법이다. 유법이란 일체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의 이치를 드러내나니, 이 심진여(心眞如)의 상(相) 그대로가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요, 이 심생멸(心生滅)의 인연(因緣)과 상(相)이 능히 대승의 체(體)․상(相)과 용(用)을 드러내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이란 간략히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법의 진여가 염(染)에 있건 정(淨)에 있건 그 성품은 항상 평등하여 증감(增減)도 허고 달라짐[別異]도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은 본래부터 무량․무변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선한 인과를 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본래 타셨던 것[乘]이며 모든 보살이 모두가 이를 타고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해석분(解釋分)인가?
여기에 세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진실한 이치를 드러내어 보임[顯示實義]과 삿된 집착을 물리침[對治邪執]과 바른 도를 수행하는 모습을 분석한 것[分別修行正道相]이다.
이 가운데 현시실의(顯示實義)란 한마음[一心]에 의하여 두 가지 문[二門]이 있으니 마음 그대로가 진여인 심진여문(心眞如門)과 마음 그대로가 생멸인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다. 이 두 문은 제각기 일체 법을 껴안고 있으니 이들은 서로서로가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이란 온 법계를 하나로 묶는 큰 법문의 틀인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니 이 마음의 본성품은 생멸하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1) 전진유법(前陳有法)의 준말이니 어떤 사물의 정의를 제시할 때 사물의 부분을 이르는 말이다. 예컨대 물이 시원하다 할 때 물은 유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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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모든 법은 모두가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는 것이나 만일 망념을 여의면 경계의 차별된 모습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어(言語)의 길이 끊겼고 일체 문자로 드러내어 설명하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반연할 길이 끊겨서 아무런 모습도 없다. 끝내 평등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서 오직 일심이기 때문에 진여라 한다. 진여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말로 할 수가 없고 분별할 수도 없다. 모든 언어는 거짓일 뿐 진실하지 않나니 다만 망념을 따를 뿐 실체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라고 말은 하였으나 이 또한 상이 없나니 다만 모든 언어 가운데의 극치일 뿐이다. 이 말로써 저 말을 물리쳤을 뿐이요 그 본체나 본성에는 물리칠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다.
? 그렇다면 중생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깨달아 들어가겠는가?
? 만일 일체 법을 말하되 말하는 이도 없고 말한 것도 없으며, 일체 법을 기억하되 기억하는 이도 없고 기억한 것도 없음을 안다면 그럴 때를 수순이라 하고, 망념이 다하면 이를 깨달아 들었다 한다.
또 진여란 것은 언어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두 가지는 차별이 있다. 첫째는 진실공(眞實空)이니 진실하지 못한 상을 끝까지 멀리 여의고 진실의 본체를 드러내기 때문이요, 둘째는 진실불공(眞實不空)이니, 본 성품이 끝없는 공덕을 갖추어 자기 본체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공이란 본래부터 모든 염법(染法)이 어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일체법의 차별된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허망한 분별심이 없기 때문이니 이로써 알라. 진여는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니며[非有相],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非無相], 유상과 무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有無相], 유상과 무상을 모두 배제하는 것도 아니며[非非有無相], 단일한 형상도 아니며[非一相], 차별된 형상도 아니며[非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이 공존하는 것도 아니며[非一
異相], 단일상과 차별상을 모두 배제한 것도 아니다[非非一異相].
간략히 말하건대 일체 중생의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접할 수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였으나 사실에 의해 말한다면 망념이란 것도 있지 않고 공의 성품이란 것 또한 공하니, 막아야 할 것이 없으면 막는 이도 따라서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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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불공(眞實不空)이란 망념이 공하여 없음으로써 진심은 항상하여 변치 않고 맑은 법이 원만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는 뜻에서 불공(不空)이라 한다. 그러나 불공의 모습 또한 없는 것이니, 망념의 마음으로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며, 망념을 여읜 지혜로 증득할 경지이기 때문이다.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것은 여래장(如來藏)에 의하여 생멸심(生滅心)이 움직이나니 생멸하지 않는 것이 생멸과 화합해서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
이 식에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일제 법을 껴안고, 일체 법을 내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이치가 있으니, 첫째는 각의 이치[覺義]요, 둘째는 불각의 이치[不覺義]다.
각의 이치[覺義]란 마음의 으뜸가는 성품[第一義性]으로서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다. 일체 망념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에 허공계와 동등해서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 그대로의 모습이니 이것이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如來平等法身]이다.
이 법신(法身)에 의하여 일체 여래를 본각(本覺)이라 하니 시각(始覺)을 상대하여 본각이라는 명칭을 세운다. 그러나 시각이 될 때가 곧 본각인지라 따로 다른 각(覺)을 세운 것은 아니다.
시각(始覺)이란 것은 본각에 의하여 불각이 있고 불각에 의하여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님[非究竟覺]이라 한다. 예컨대 범부가 앞생각엔 불각이어서 번뇌를 일으키다가 뒷생각에서 제어하고 항복시켜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각이라 할 수는 있으나 역시 불각이요, 이승의 무리[二乘人]나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들이 생각 있음[有念]과 생각 없음[無念]의 본체와 형상이 다른 것을 깨닫고 거친 분별[麤分別]을 버리면 비슷한 깨달음[相似
覺]이라 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 생각 있음과 생각 없음이 모두 명상이 없는 것을 깨달은 뒤에 중품의 분별[中品分別]을 버리면 상당한 수준의 깨달음인 수분각(隨分覺)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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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보살의 경지를 초과하여 끝맺는 도[究竟道]가 만족해져서 잠깐 사이[一念]에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으면 비로소 각이라 할 수 있는 시각(始覺)이요, 깨달았다는 상도 멀리 여의어 미세한 분별[微細分別]마저 끝까지 다하여 마음의 근본인 성품이 항상 머무르면서 눈앞에 나타나면 이것을 여래의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어떤 중생이 일체 망념이 모습 없는 줄로 관찰하면 이것이 곧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다만 세속을 따라 말했을 뿐이나 그 첫 모습을 구하면 끝내 얻을 수 없다. 마음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하물며 처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각이라 하지 못하나니,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무명과 망념이 있어 이어지면서 잠시도 여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망념이 쉬면 즉시에 마음의 모습인 생(生)․주(住)․이(異)․멸(滅)이 모두가 모습이 없는 것임을 알리니, 한마음의 앞과 뒤가 동시일 뿐 모두가 서로 응
하지 못하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나면 시각이란 것도 얻을 수 없음을 아나니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본각이 염의 분별[染分別]을 따라 두 가지 차별된 모습이 생기나니, 첫째는 지혜의 바탕이 청정한 상[淨智相]이요, 둘째는 부사의하게 중생을 교화하는 작용을 일으키는 상[不思議用相]이다.
정지상(淨智相)이란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해서 공행(功行)이 만족해지면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전식(轉識)의 모습을 멸하면 법신의 청정한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체 심과 식의 모습[心識相]은 그대로가 무명의 모습이거니와 본각과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서 무너지는 것도 아니요,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나니 파도가 바람을 인해 움직이지만 물의 성질은 움직이지 않고 바람이 멈출 때엔 파도는 사라지나 물의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이 무명이라는 바람이 흔드는 까닭에 식(識)의 물결이 일어나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모두가 형상이 없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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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성의 청정한 마음은 요동하는 식의 근본이니 무명이 멸할 때에 요동하는 식은 따라서 멸하나 지혜의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부사의용상(不思議用相)이란 맑은 지혜에 의하여 일체 수승하고도 묘한 경계를 일으키되 항상 끊어짐이 없는 것이니, 이른바 여래의 몸에 한량없고 가장 수승한 공덕을 갖추고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무량한 이익을 성취하는 모습을 시현하는 것이다.
또 각의 모습에는 네 가지 큰 이치가 있어 청정함이 허공 같고 밖은 거울 같으니, 첫째는 진실로 공한 큰 이치[眞實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마음과 경계의 모습과 그리고 깨달음의 모습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은 큰 이치[眞實不空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일체 법이 원만히 성취되어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성품이며,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이 모두 그 안에서 나타나
되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며 멸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항상 머무는 한마음이며, 일체 물든 법이 물들이지 못하는 바이며, 지혜의 바탕에 끝없는 무루의 공덕을 구족한 것으로 인(因)을 삼아 일체 중생의 마음에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장애를 여의는 큰 이치[實不空離障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두 가지를 영원히 끊고 화합식(和合識)이 멸하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경지에서
항상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넷째는 진실로 공하지 않아 시현하는 큰 이치[眞實不空示現大義]가 허공 같고 밝은 거울 같음이니, 이른바 장애를 여읜 법에 의하여 응화(應化)해야 할 계제에 따라 여래 등의 갖가지 빛과 소리를 시현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닦게 하기 때문이다.
불각의 이치[不覺義]란 끝없는 옛적부터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깨닫지 못하는 마음[不覺心]이 일어나서 망념(妄念)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망념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바른 방위에 의한 까닭에 미흑했으나 미흑이란 것이 자체가 없어서 본래의 방위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서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과 망념이 있어 미혹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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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불각은 원래 실체가 없어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또 불각을 상대하여 진각(眞覺)을 말하거니와 불각이 이미 없으므로 진각 또한 없다.
또 각에 의한 까닭에 불각이 있어 세 가지 모습을 내어 서로 여의지 않는다. 첫째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니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움직이면 업이 된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과(果)가 인(因)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보는 주체인 능견상(能見相)이니, 마음의 움직임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경계를 보는 것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보는 주체도 없다. 셋째는 보이는 대상인 경계상(境界相)이니, 보는 견에 의하여 허망한 경계
가 나타나고 견을 여의면 경계도 없어진다.
허망한 경계인 연(緣)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을 낸다.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이른바 경계를 반연하여 사랑스럽다거나 사랑스럽지 않다는 마음을 내는 것이요,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이른바 지혜에 의하여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느낌을 내어 상응함이 끊이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집착상(執着相)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의 느낌이 이어짐에 의하여 집착이 생기는 것이요, 넷째는 집명등상(執名等相)이니, 이른바 집착에 의하여 명칭 등 모든 나열
된 현상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이른바 명칭 등에 집착함에 의하여 갖가지 온갖 차별된 업을 일으키는 것이요, 여섯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이른바 업에 의하여 고통을 받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염법(染法)은 모두가 제 모습이 없는 것이니, 모두가 무명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또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동상(同相)이란 것은 마치 갖가지 토기(土器)가 모두 같은 흙의 모습이듯이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갖가지 요술 같은 작용은 모두가 같은 진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옛적부터 항상 열반에 들었고, 보리는 닦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며 생겨나는 모습도 아니어서 끝내 얻을 수도 없고, 어떤 색상으로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색상을 보는 것은 마땅히 알라. 모두가 염(染)을 따르는 요술 같은 작용일 뿐이요, 지혜가 색(
色:물질)처럼 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지혜의 모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많은 것을 경전들에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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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異相)이란 마치 갖가지 토기가 제각기 같지 않은 것같이 이 일도 그러하여서 무루와 무명의 요술 같은 작용의 모습이 차별된 것뿐이다.
또 생멸하는 동기인 생멸인연(生滅因緣)이란 이른바 모든 중생이 마음[心]과 뜻[意]과 식(識)에 의하여 움직인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의하여 무명과 불각(不覺)이 일어나서 보고[能見] 나타내고[能現] 경계를 취하고[能取境界] 분별하여 상속하는 것[分別相續]을 의(意)라 한다.
이 의(意)에 다시 다섯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째는 업식(業識)이니 이른바 무명의 힘으로 불각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요, 둘째는 전식(轉識)이니 움직인 마음에 의하여 경계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셋째는 현식(現識)이니 이른바 일체 경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치 밝은 거울이 뭇 색상(色傷)을 나타내는 것 같이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가 이르기만 하면 곧 나타나되 전후도 없고 다른 공력을 말미암지도 않는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니
이른바 염과 정의 온갖 차별된 법을 분별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니 이른바 항상 뜻을 지어 상응하기를 끊이지 않아 과거의 선악 등의 업을 잘 간직하여 잃거나 무너짐이 없게 하고,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키되 어기거나 뛰어넘음이 없게 하고, 이미 지난 일을 흘연히 기억하게 하고, 아직 지나지 않은 일들을 공연히 분별하게 한다.
그러므로 삼계의 일체 법은 모두가 마음으로 제 성품을 삼나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주체로 삼아 망념을 좇아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은 모두가 자기의 마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 없고 명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 세간의 경계의 모습은 모두가 중생의 무명과 망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를 얻을 수
없건만 오직 허망한 분별심을 따라 일어난 것뿐이니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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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意識)이란 이른바 일체 범부가 상속식(相續識)에 의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를 집착하여 갖가지로 여섯 가지 경계를 취하는 것이니, 각기 다르므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하고, 사물을 분별해 알기 때문에 분별사식(分別事識)이라고도 하니, 견(見)과 애(愛) 등의 훈습에 의해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는 옛적부터의 무명의 훈습으로 일어난 식(識)은 범부나 이승(二乘)들의 지혜로는 알 바가 아니요, 해행지보살(解行地菩薩)이라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하고 법신보살(法身菩薩)이라야 조금 알고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러도 다 알지 못하고 오직 여래만이 끝까지 분명히 아신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였으나 무명의 힘 때문에 물든 마음의 모습이 나타났고,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나 항상 밝고 맑아서 변함이 없다. 또 본성이 분별이 없는 까닭에 비록 일체 경계를 두루 내지만 변하고 바뀜이 없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서로 어울리지 못하여 무명의 분별이 일어나서 온갖 물든 마음을 낼 뿐이다. 이러한 이치는 매우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부처님만이 능히 아실뿐 다른 이의 경계는 아니다.

이렇게 생겨난 물든 마음[染心]에는 여섯 가지 다름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執]이며, 상응하는 염심[相應染]이니, 성문과 연각과 그리고 신과 상응하는 지위[信相應地]로서 보살이 능히 멀리 여읜다. 둘째는 끊이지 않고 상응하는 염심이니, 신의 지위에 있는 보살이 부지런히 수행하는 힘 때문에 조그만지 여의고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면 영원히 다해 남음이 없다. 셋째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상응하는 염심이니, 구계지(具戒地)로부터 구혜지(具慧地)에 이르
는 사이에 능히 조그만큼 여의고, 무상행지(無相行地)에 이르러야 비로소 멀리 여읜다. 넷째는 현색(現色)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不相應染]이니, 이는 색자재지(色自在地)에서 끊어 없앤다. 다섯째는 견심(見心)이며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심자재지(心自在地)에서 끊는다. 여섯째는 근본업(根本業)이 상응하지 않는 염심이니, 이는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와 여래지(如來地)에서 끊는다.
하나인 법계를 깨닫지 못한다[不覺一法界]는 것은 처음에 신지(信地)로부터 관찰하고 수행을 일으켜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조금 여의고, 여래지(如來地)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영원히 여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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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응(相應)의 뜻은 마음의 구분이 차별되고 다르며, 염과 정이 구분도 차별되고 달라서 지각하는 주체인 지상(知相)과 경계의 모습인 연상(緣相)이 같은 것이요, 불상응(不相應)의 뜻은 마음[心]과 불각(不覺)이 항상 차별도 차이도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은 것이다.
염심(染心)이란 번뇌장(煩惱障)이니 진여를 아는 근본지(根本智)를 장애하기 때문이요,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소지장(所知障)이니 세간을 건지는 업의 자재한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가 어떠한가? 염심에 의하여 한량없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와 허망한 성품을 어기는 것이다. 일체 법의 성품은 평등하고 적멸하여 생기는 모습이 없지만 무명과 불각이 허망되게 각(覺)과 어긴다. 그러므로 일체 세간의 갖가지 경계와 차별된 업용(業用)에 대하
여 모두를 여실히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생멸의 모습[生滅相]을 분별하건대 두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거친 것[麤相]이니 이른바 상응의 마음이요, 둘째는 미세한 것[細相]이니 이른바 불상응의 마음이다. 추 중의 추[麤中之麤]는 범부의 지혜의 경계요, 추 중의 세[麤中之細]와 세 중의 추([細中之麤]는 보살의 지혜 경계이다. 이 두 가지 모습은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는 힘을 말미암아 일어난다. 그러나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하나니, 인은 불각이요, 연은 망령된 경계[妄境
]이다. 인이 멸하면 연이 멸하고 연이 멸하는 까닭에 상응의 마음이 멸하고 인이 멸하는 까닭에 불상응의 마음이 멸한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찌 멸했다 하겠는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멸한다는 것은 다만 마음의 모습이 멸했을 뿐 마음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바람을 인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다가 바람이 멸하면 움직이는 모습은 멸하나 물의 본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물이 멸한다면 움직이는 모습도 끊어지리니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하는 바[所依]가 없기 때문이거니와 물의 본체는 멸하지 않으므로 움직이는 모습은 상속한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거니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모습은 곧 멸하나 마음의 본체는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마음이 멸한다면 중생이 끊어지나니 능의도 소의도 없기 때문이거니와 마음의 본체는 멸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은 상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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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네 가지 법이 훈습(熏習)의 이치 때문에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일어나서 끊이지 않나니, 첫째는 정법이니 이른바 진여(眞如)요, 둘째는 염인(染因)이니 이른바 무명(無明)이요,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이른바 업식(業識)이요, 넷째는 망령된 경계[妄境]니 이른바 육진(六塵)이다.
훈습의 이치란 마치 세상의 의복이 본래는 구린내도 아니요 향내도 아니지만 어떤 물건으로 훈습하느냐에 따라 그 향기를 띄는 것같이, 진여인 정법의 성품은 물듦이 아니지만 무명이 훈습하기 때문에 물든 모습이 있고, 무명인 염법은 실로 맑은 업이 없지만 진여가 훈습하기 때문에 맑은 기능인 정용(淨用)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에 의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켜 모든 염법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 무명은 바로 진여를 훈습하나니, 이미 훈습한 뒤에는 망념(妄念)이 생긴다. 이 망념이 다시 무명을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진여의 법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망령된 경계의 모습이 나타난다. 망념으로 훈습하는 힘 때문에 갖가지 차별된 집착을 내어 갖가지 업을 짓고 몸과 마음은 갖가지 과보를 받는다.
망경훈습(妄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分別熏]이요, 둘째는 집착을 늘어나게 하는 훈습[增長執取熏]이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업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根本業熏]이니, 아라한이나 벽지불(辟支佛)이나 일체 보살들로 하여금 생멸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분별사식을 증장시키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이니 범부들로 하여금 업계고(業繫苦)를 받게 하는 것이다.
무명훈습(無明熏習)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훈(根本熏)이니 업식(業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요, 둘째는 견애훈(見愛熏)이니 분별사식(分別事識)을 성취시킨다는 뜻이다.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이 끊이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眞如)로 무명에 훈습하는 것이니,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망념심(妄念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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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망심으로 싫어하거나 구하는 인연으로 다시 진여를 훈습하나니 훈습하기 때문에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어 그 본 성품이 청정함을 스스로 믿고 일체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였을 뿐이어서 끝내 실체가 없는 줄로 안다. 이와 같이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법을 닦고 갖가지로 모든 수순하는 행을 일으키되 분별하는 바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이 무량아승기겁을 지나면 관습의 힘 때문에 무명이 사라지고,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경계의 모습이 멸한다. 이와 같이 일체 염인(染因)과 염연(染緣)과 그리고 염과(染果)의 마음 자취[心相]가 모두 사라지면 비로소 열반을 얻어 갖가지 자재한 업용(業用)을 성취했다고 말한다.
망심훈습(妄心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훈(分別事識熏)이니 일체 범부와 이승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상도로 향해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의훈(意熏)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발심이 용맹하여서 머무름 없는 열반[無住涅槃]에 빨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여훈습(眞如熏習)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체훈(體熏)이요, 둘째는 용훈(用熏)이다.
체훈(體熏)이란 이른바 진여가 끝없는 옛적부터 일체 무량한 무루법을 갖추고 있고, 또 헤아릴 수 없는 경계에 대응하는 작용을 갖추고 있으면서 항살 끊임없이 중생들의 마음을 훈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힘 때문에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되 자기의 몸에 진실한 법이 있음을 스스로 믿고 발심하여 수행하게 한다.
? 일체 중생이 똑같이 진여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균등하게 훈습하거늘 어찌하여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가 있는가?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앞뒤가 같지 않고 한량없이 차별되니 이러한 일체가 모두 균등해야 할 것이다.
? 일체 중생이 비록 균등한 진여를 가지고 있으나 끝없는 옛적부터 무명의 두텁고 엷음이 끝없어 차별됨이 항하의 모래 수효보다 많고, 아견(我見)과 아애(我愛) 등 얽힌 번뇌도 이와 같아서 여래의 지혜라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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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믿음 등이 앞뒤로 차별된다.
또 부처님들의 법에는 인도 있고 연도 있나니, 인과 연이 구족하여야 그 일을 끝낼 수 있다. 마치 나무속의 불의 성품 같나니, 이것이 불의 진짜 인[正因]이거니와 만일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설사 안다 해도 아무런 공을 베풀지 않고도 불이 나와 나무를 태우고자 한다면 이는 옳지 않듯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비록 진여가 체훈(體熏)하는 정인(正因)의 힘이 있으나 부처님들이나 보살들이나 선지식들의 연(緣)을 만나지 못했거나 설사 만났더라고 수승한 행을
닦지 않거나 지혜를 내지 않거나 번뇌를 끊지 않고도 열반을 얻고자 하면 옳지 못하다.
또 비록 선지식의 연이 있더라도 안에서 진여가 훈습해 주는 정인의 힘이 없다면 역시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구족하여야 비로소 옳다.
어떤 것이 구족함인가? 이른바 스스로가 상속하는 가운데 훈습하는 힘과 불․보살님이 자비로 거두어 주심이 있으면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이 있음을 믿고 모든 선근(善根)을 심어 성숙하게 하고, 여기에 다시 불․보살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이롭게 해 주시고 기쁘게 해 주심을 만나면 수승한 행을 닦아 마침내 성불하여 열반에 든다.
용훈(用熏)이란 곧 중생들의 바깥 인연[外緣]의 힘이니, 무량한 차별이 있으며 간략히 두 종류를 말한다. 첫째는 차별된 연[差別緣]이요, 둘째는 평등한 연[平等緣]이다.
차별연(差別緣)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처음에 발심하여 성불하기까지 불․보살 등 모든 선지식이 알맞은 분에 따라 몸을 나투어 보이시는 것이니, 부모․처자․권속․노비․친우․원수거나 혹은 천왕의 모습이거나 혹은 사섭(四攝), 혹은 육도(六度), 나아가서는 일체 보리행의 연과 대비(大悲)라고 부드러운 마음과 광대한 복과 지혜로써 갈무리하여 교화해야 할 일체 중생에게 훈습해서 그들로 하여금 보거나 듣게 하고 나아가서는 여래의 형상 등을 마음에 새겨 선근이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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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緣)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연[近緣]이니 속히 보리를 얻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 연[遠緣]이니 오랜 다음에야 비로소 얻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차별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행이 늘어나는 연[增行緣]이요, 둘째는 도에 드는 연[入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이른바 일체 불․보살께서 평등한 지례와 평등한 지원(志願)으로써 일체 중생을 두루 구제코자 하심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영원히 끊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와 원으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불․보살님을 기억하게 하다가 흑은 뵙거나 흑은 들은 이에게 이익을 주고, 청정한 삼매에 들어 장애를 끊은 분에 따라 걸림이 없는 눈[無礙眼]을 얻고 잠깐 잠깐 사이에 일체 세계에서 평등하게 그리고 훤하게 한량없는 불․보살님을 뵙게 한다.
이 체와 용의 훈습[體用熏習]에 두 가지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서로가 만나지 못하는 미상응(未相應)이요, 둘째는 서로가 만나는 이상응(已相應)이다. 미상응(未相應)이란 이른바 범부와 이승(二乘)과 초행보살(初行菩薩)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훈습하되 오직 믿음의 힘에 의하여 수행할 뿐 분별없는 마음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체(體)와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재한 업으로 수행하지 못하니 진여의 용(用)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응(已相應)이란 이른바 법신보살(法身菩薩)이 분별없는 마음[無分別心]을 얻나니 일체 여래의 자체(自體)와 상응하기 때문이요, 자재한 업을 말 수 있나니 일체 여래의 지혜의 용과 상응하기 때문이요, 오직 법력에 의해야만 자유로이 수행하나니, 진여를 훈습해서 무명을 멸하기 때문이다.
또 염훈습(染熏習)은 끝없는 예부터 끊어지지 않다가 성불하면 끊어지고 정훈습(淨熏習)은 미래가 다하도록 끝내 금어지지 않나니, 진여법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사라지고 법신이 드러나서 용훈습(用熏習)이 일어나기 때문에 끊임이 없다.
또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 범부와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제불이 조금의 증감(增減)도 없다. 앞 시간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뒷 시간에 멸하는 것도 아니니 항상하고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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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예부터 본성품은 일체 공덕을 갖추었으니, 이른바 큰 지혜 광명의 이치와 온 법계에 두루 비추는 이치와 여실타계 분명히 깨닫는 이치와 본 성품이 청정한 마음인 이치와 항상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깨끗한 이치와 적정해서 변치 않는 이치 등이다. 이렇듯 항하사 수를 지나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고 부사의한 불법이 끊임이 없다. 이러한 이치에 의한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법신(法身)이라고도 한다.
? 위에서 ‘진여는 일체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이제 다시 ‘일체 공덕의 상을 갖추었다’고 말하는가?
? 비록 진실로 일체 공덕을 갖추었으나 차별된 모습이 없나니, 그 모든 법은 모두가 다 같이 한맛[一味]이며 한 진여[一眞]여서 분별의 모습을 떠난 둘 없는 성품이니 업식(業識) 등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하여 저들 일체 차별된 모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세워졌는가? 일체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실로 분별이 없건만 불각(不覺) 때문에 분별의 마음이 일어나서 경계(境界)가 있는 것으로 보니, 이를 무명(無明)이라 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본래 맑은 것이므로 진여 그 자리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이치를 세운다. 만일 마음의 성품이 경계를 본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거니와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진여 그 자리에 법계를 두루 비추는 이치[遍照
法界義]를 세운다.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아니며, 본 성품이 청정한 것도 아니며, 상(常)․낙(樂)․아(我)․정(淨)도 아니며 적정(寂靜)도 아니어서 변함[變異]이며 자유롭지 못함[不自在]이다. 그런 까닭에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허망한 잡염(雜染)이 일어나거니와 마음의 성품은 움직임이 없으므로 그 자리에 진실되게 깨달아 아는 이치[眞實了知義]와 나아가서는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청정공덕상의 이치[淸淨功德相義]를 세운다.
마음에 일어남[起]이 있어 바깥 경계를 분별해 구할 것이 있다고 보면 안의 법[內法]에 부족한 바가 있겠거니와 끝없는 공덕은 그대로가 한마음 제 성품이어서 어떤 다른 법을 다시 구할 것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족함이 항하사를 지나되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고 부사의하며, 모든 부처님의 법은 끊임이 없다. 그러므로 진여라 말하며, 또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하며 또는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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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일체 부처님들께서 인지(因地) 때에 큰 자비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과 사섭(四攝) 등의 행을 닦아 행하고, 중생이 자기 같다고 관찰하여 두루 구제하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겁의 수효를 정하지 않으며, 나와 남이 평등함을 여실히 알되 중생이란 상을 짓지 않으셨다.
이러한 큰 방편의 지례로 끝없는 예로부터의 무명을 멸하고 본래부터 있는 법신을 깨달아 자유로이 부사의한 업[不思議業]을 일으키되 갖가지 자재하고 차별된 작용이 법계에 두루하여 진여와 꼭 같으나 그 용의 모습은 찾을 수도 없으셨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일체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뿐이기 때문이니 제일의제(第一義諦)에는 세제(世諦)의 경계와 작용이 없건만 다만 중생들의 보고 들음 등을 따르기 때문에 갖가지 작용이 있어 같지 않다.
이 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사식(分別事識)에 의하는 것이다. 이른바 범부나 이승들이 마음으로 보는 바이니, 이를 화신(化身)이라 한다. 이 사람은 전식(轉識)의 그림자가 나타난 것임을 알지 못하므로 밖에서 왔다고 여겨 색(色)의 영역을 취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화신은 한량이 없다.
둘째는 업식(業識)에 의하는 것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한 뒤로부터 구경지(舊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바로서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 한다. 몸에는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는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는 무량한 잘 생긴 모습이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에도 무량한 공덕과 장엄이 갖추어졌다. 보는 근기에 따라 무량하고 끝도 없고 가도 없고 끊어짐도 없지만 마음 밖에서 이렇듯이 보지는 않는다. 이 모든 공덕은 모두가
바라밀 등 무루행(無漏行)의 훈습과 부사의한 훈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서 끝없는 기쁨과 즐거움의 공덕의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도 한다.
또 범부들이 보는 바는 거친 용[麤用]이니 육취(六趣)의 갖가지 차별에 따라 끝없는 공덕의 즐거운 모습이 있으니 이를 화신이라 한다. 처음 수행하는 보살들이 보는 바는 중품의 용[中品用]이니 진여의 실체를 깊이 믿기 때문에 조금만 보아도 여래의 몸은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끊임도 없어서 오직 마음의 그림자로 나타난 것이라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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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미세한 분별을 여의지 못했나니 법신의 지위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심지(淨心地)의 보살이 보는 바는 미세한 용[微細用]이니, 이와 같이 차츰 수승해져서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면 보는 일이 바야흐로 다한다.
이 보살의 미세한 용을 수용신(受用身)이라 하나니,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에 수용신이 있다고 보거니와 업식을 여의면 볼 수가 없다. 일체 여래는 모두가 법신이어서 피차가 차별된 색상으로 마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부처님의 법신에 갖가지 차별된 색과 모습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 색과 모습을 나타내는가?
? 법신은 색의 실체이기 때문에 갖가지 색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의 본 성품이 곧 마음의 자성(自性)인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고 마음의 본 성품이 곧 색의 자성인 것을 법신(法身)이라 한다.
법신에 의해 일체 여래께서 나투신 색신이 일체 처소 어디에나 두루하여 끊임이 없거든 시방의 보살이 자기의 능력과 좋아함에 따라 무량한 수용신과 무량한 장엄국토가 제각기 차별되지만 서로가 장애치 않고 끊임이 없음을 본다. 이렇게 나타난 색신은 일체 중생의 마음․뜻․의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나니, 이는 진여의 자재하고도 심히 깊은 용(用)이기 때문이다.
또 중생들로 하여금 생멸문에서 진여문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색 등의 모습이 성취되지 못하는 것으로 관찰하게 하나니, 어떻게 성취되지 못하는가? 이른바 거친 색을 분석하여 차츰 미진(微塵)에 이르고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이 미진을 분석한다. 그러므로 거칠거나 미세한 모든 색은 오직 허망한 마음의 그림자일 뿐 실제로 있지 않다. 다른 온법(蘊法)을 추구하여 차츰 찰나(刹那)에 이르나 이 찰나의 상도 달라서 하나가 아니다.
무위(無爲)의 법도 이와 같아서 법계를 떠나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시방의 모든 법도 모두가 그러한 줄로 알라.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동쪽을 잘못 알아 서쪽이라 여기나 방위는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처럼, 중생도 그러하여서 무명의 미혹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여기거니와 실은 움직이지 않나니, 만일 움직이는 마음 그대로가 생멸치 않는 것임을 안다면 곧 진여의 문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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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 하권



마명보살 지음

실차난타 한역

김월운 번역



대치사집(對治邪執)이란 일체 삿된 집착이 모두가 나라는 소견[我見]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나니, 만일 아견을 여치면 삿된 집착도 없다.
아견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요,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인아견이란 모든 범부에 의하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경에 “여래의 법신은 끝내 적멸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은 범부들이 듣고는 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하기를 ‘여래의 성품은 허공과 같아서 항상 두루했다’고 한다. 그런 집착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허공의 모습도 오직 분별일 뿐 실제로 얻을 수 없다고 밝힌다. 볼 수 있는 색[有見色]과 대할 수 있는 색[有對色]으로 모든 색을 상대하는 것은 마음의 분별일 뿐이므
로 허공이라 말한다. 색(色)이 이미 방심의 분별일 뿐이라면 허공도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체 경계의 모습은 오직 망심의 분별이기에 만일 망심을 여의면 경계의 모습도 사라져서 오직 진여의 마음이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나니, 이것이 여래의 자성이 허공과 같다는 뜻일 뿐이요 허공이 항상하다든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경에서 “일체 세간의 법은 모두가 끝내 공한 것이며, 나아가 열반이나 진여의 법까지도 끝내 공하니, 본 성품이 이와 같아서 일체의 모습을 여의었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은 범부들이 듣고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므로 곧 ‘열반이나 진여의 법도 오직 공뿐이어서 아무 것도 없다’고 집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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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집착을 깨뜨려 주기 위하여 진여와 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않음을 밝히나니, 한량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에서 “여래장(如來藏)에는 일체 성품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은 범부가 듣고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에는 원래 색과 심의 제 모습의 차별이 갖추어졌다’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깨뜨려 주기 위하여 진여에는 본래 물든 법의 차별이 없으므로 끝없는 공덕의 모습이 있다는 주장을 세웠을 뿐, 물든 모습은 아니라고 밝힌다.
넷째는 경에서 “일체 세간의 모든 잡되고 물든 법은 모두가 여래장에 의해 일어나므로 일체 법은 진여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은 범부가 듣고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장에 일체 세간의 잡되고 물든 법이 갖추어졌다’고 말한다. 그런 집착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여래상에는 본래부터 항하사 수효를 지나는 청정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어 진여와 다르지 않고, 항하사 수를 지나는 번뇌의 물든 법은 오직 허망으로 있을 뿐이요 본래 제
성품이 없어서 끝없는 옛적부터 잠시도 여래장과 어우른 적이 없다고 밝힌다. 만일 여래장이 물든 법과 어우른다면 그것을 증득해 깨달음으로써 허망한 물듦이 쉬어진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다섯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의해야 생사도 있고, 열반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어리석은 범부가 듣고는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곧 ‘여래장에 의해서 생사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시작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다시 열반에 끝이 있다고 한다. 이런 집착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여래장에는 시작[初際]이 없는데 무명이 그를 의지하므로 생사에 시작이 있다고 밝힌다. 만일 누군가가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생기는 곳이 있다”라고 말하면 이는 외도경(
外道經)의 말이요 불교는 아니다. 여래장은 끝이 없으므로 이를 증득해서 생사의 종자를 영원히 끊고 열반을 얻으면 역시 끝이 없다.
인아견에 의하여 네 가지 견해가 생기나니, 그러므로 여기에 그 네 가지를 세운다.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들은 둔근(鈍根)이기 때문에 세존께서 인무아만을 말씀해 주시니, 그들은 문득 오온(五蘊)의 생멸을 끝까지 집착하여 생사를 두려워하고 허망하게 열반의 법을 취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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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집착을 제거해 주기 위하여 오온의 법은 본 성품이 나지 않는다고 밝힌다. 나지 않기 때문에 멸함도 없고, 멸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 열반이니, 만일 분별과 집착을 끝까지 어의면 일체 물든 법과 깨끗한 법이 모두 맞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모든 법은 본래부터 빛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앎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요 있음도 아니다. 끝내는 모두가 말로 말할 수 없는 모습이건만 말로써 보이고 가르치신 적이 있는 것은 모두가 여래의 선교(善巧)한 방편으로 언어를 의지하여 중생을 인도해서 문자를 버리고 진실에 들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말을 따라 이치에 집착하여 허망한 분별을 더하면 실다운 지혜를 낼 수도 없고 열반을 얻을 수도 없다.
분별수행정도상(分別修行正道相)이란 일체 여래께서 도를 얻으시던 바른 인행[正因]을 일체 보살들이 발심하고 닦아 익히어 오롯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발심(發心)을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모습이 있으니, 첫째는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해행발심(解行發心)이요, 셋째는 증발심(證發心)이다.
신성취발심이란 어떤 지위에 의하여 어떤 행을 닦아야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하기에 족한가?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부정취(不定聚)에 의하여 법으로 훈습한 선근의 힘 때문에 업과 과보를 깊이 믿고 십선도(十善道)를 행하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다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만나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모든 행을 골고루 수행하기 십천 겁에야 믿음이 비로소 성취된다.
이로부터 혹은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께서 가르쳐 주시는 힘이나 흑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나 혹은 정법이 멸하려는 것을 보고 법을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발심하는 이가 있나니, 이렇게 발심하기만 하면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서 끝내 물러나지 않고 부처님의 종성(種性)에 머물러 수승한 인(因)과 서로 응한다.
혹은 어떤 중생은 아주 오랜 옛적부터 선근이 미약하고 적으며, 번뇌가 깊고도 두텁게 그 마음을 덮고 잇기 때문에 비록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을 만나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더라도 겨우 인간이나 하늘에 태어날 종자만을 심거나 흑은 이승의 과위를 얻을 보리종자를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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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대승의 보리를 구하더라도 근기가 안정되지 못하여 혹은 전진했다가 혹은 후퇴하기도 한다. 혹은 부처님들이나 보살님들을 만나 공양하고 받들어 검기고 온갖 행을 수행하더라도 십천 겁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인연을 만나 발심하기도 한다. 어떤 인연을 만나는가? 이른바 부처님의 형상을 뵙거나 혹은 여러 스님들에게 공양하거나 흑은 이승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흑은 다른 이가 발심하는 것을 보는 것 등이다. 이러한 발심들은 모두가 결정되지 못한 것이니
, 만약 나쁜 인연을 만나면 간혹 이승의 경지로 물러나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신성취발심을 간략히 말하건대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르고 곧은 마음을 일으킴[發正直心]이니 이치에 맞게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는 일이요, 둘째는 깊고도 중한 마음을 일으킴[發深重心]이니 모든 선행(善行)을 즐거이 모으는 일이요,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킴[發大悲心]이니 일체 중생의 고통을 건져 주기를 원하는 일이다.
? 일체 중생과 일체 모든 법은 모두가 동일한 법계이어서 두 모습이 없나니, 이치에 의거하건대 다만 진여(眞如)만을 똑바로 생각할 것이거늘 어찌 다시 일체 선행을 닦아 일체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가?
? 그렇지 않다. 마치 마니보배의 본 성품이 맑고 깨끗한데 더러운 광석 속에 있거든 어떤 사람이 애써 생각만 할 뿐 방편을 쓰지 않거나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마니보배의 청정함은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진여의 법도 그와 같아서 그 본체는 비록 밝고 맑아 공덕이 구족하지만 끝없는 객진(客塵)에 의해 더럽혀졌거든 어떤 사람이 애써 생각만 할 뿐 방편을 쓰지 않거나 모든 행을 닦지 않고서 진여의 청정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끝내 이치를 얻지 못
한다. 그러므로 일체 선행을 모으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야 하나니, 끝없는 객진으로 물든 때를 여의면 그 자리에 진여의 법이 나타난다.
그 방편의 행에는 대략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니, 이른바 일체 법은 본 성품이 생함이 없다고 관찰하여 망견(妄見)을 여의고 생사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요, 또 일체 법은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선한 행을 닦고 중생들을 거두고 교화하여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니, 진여는 생사와 열반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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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行)은 법성을 수순함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행근본방편이라 한다.
둘째는 능지식방편(能止息方便)이니, 이른바 부끄러워함[慚愧]과 잘못을 뉘우침[悔過]이다. 이는 일체 악법을 멈추어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하니, 진여는 일체 과실(過失)을 여윈 모습이기 때문이다. 진여를 수순해서 모든 악을 그치고 쉬므로 이를 능지식방편이라 한다. 셋째는 생장선근방편(生長善根方便)이니, 이른바 삼보에 대하여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존중하고 공양하고 정례(頂禮)하고 칭찬(稱讚)하고 수희(隨喜)하고 권청(勸請)하여 바른 믿음이
자라나고, 나아가서는 마음을 모아 위없는 보리를 구하며 불․법․승의 위신력과 가호를 받아 업장이 청정해지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진여는 일체 장애를 여의고 일체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진여를 수순해서 착한 업을 수행하니, 이를 생장선근 방편이라 한다.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니, 이른바 큰 서원을 세우되 미래제가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머무르게 하리라 하는 것이다. 일체 법은 본 성품이 둘이 없고, 피차가 평등하고 끝내 적멸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진여의 이러한 세 가지 모습에 수순하여 큰 서원을 세운다. 이를 대원평등방편이라 한다.
보살이 이렇게 발심할 때에 부처님의 법신을 조금 보고, 원력(願力)에 따라 여덟 가지 일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도솔천궁에 내려오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불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법신이라 이름하지 못하나니, 과거 무량겁 이래의 유루업(有漏業)을 다 끊지 않았기 때문이니, 흑은 악업 때문에 적은 고통을 받는 일이 있으나 원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요, 업에 얽매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경에서 “신성취발심에 이른 보살이 악취(惡趣)에 퇴타(退墮)라는 일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초학자들이 게으른 마음이 많아서 바른 지위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서 용맹심을 더하게 했을 뿐이요 진실된 말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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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뒤에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로 모든 고행을 닦되 마음에 겁냄이 없어 이승(二乘)의 경지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거늘 하물며 악도(惡道)이겠는가? 만일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갖가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아야 비로소 부처를 이를 수 있다는 말을 들어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거늘 하물며 이승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악도에 떨어지는 일이 있겠는가? 그 이유는 일체 모든 법이 본래부터 본성이 열반임을 결정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해행발심(解行發心)이라 함은 마땅히 알라. 더욱 수승해지는 지위이니, 첫 아승기겁이 곧 차려는 까닭이며, 진여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일체 행을 닦되 모두에 집작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법성에는 간탐(慳貪)의 모습을 여윈 것이 곧 청정한 시도(施度)임을 알아서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을 수순하여 수행하고, 법성에는 오욕(五欲)의 경계를 여의고 파계(破戒)의 모습이 없는 것이 곧 청정한 계도(戒度)임을 알아서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수순하여 수행하근 법성에는 고뇌(苦惱)가 없고, 성냄의 모습을 여윈 것이 곧 청정한 인도(忍度)임을 알아서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수순하여 수행하고, 법성에는 몸과 마음의 모습을 여의었고
게으름이 없는 것이 곧 청정한 진도(進度)임을 알아서 선나바라밀(禪那波羅蜜)을 수순하여 수행하고 법성에는 어리석음[痴暗]을 여읜 것이 곧 혜도(慧度)임을 믿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수순하여 수행 한다.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함이니,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境界)를 말하거니와 실제로 증득한 경지에는 경계의 모습이 없다.
이 보살은 분별이 없어진 지혜[無分別智]로써 언설을 여읜 진여[離言說眞如]의 법신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 시방 일체 세계에 두루 가서 여러 부처님들께 공양하고 법륜 굴리시기를 청하되 오직 중생을 위하여 이익된 일을 하려할 뿐 아름답고 묘한 음성을 듣기 위함은 아니다.
흑은 겁약한 중생을 위하여 큰 정진으로 무량겁을 뛰어넘어 속히 정각을 이루는 모습을 시현하며, 흑은 게으른 중생을 위하여 무량 아승기겁을 지나도록 오랫동안 고행을 하고서야 비로소 성불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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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무수한 방편을 시현하는 것은 모두가 일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거니와 실제에는 보살의 종성(種性)이나 모든 근(根)이나 발심이나 깨달음[作證]이 모두가 동등하여 유달리 뛰어난 법이 없나니, 분명 모두가 삼 아승기겁을 지나서 정각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들의 세계가 같지 않으므로 수행하는 모습도 갖가지로 차별됨을 보인다.
이 증발심에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걸림 없이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일어났다 멸했다 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이 복덕과 지혜 두 가지 장엄을 모두 원만하게 한 뒤에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 세간에서 가장 존귀하고 수승한 몸을 성취하고는 한 생각에 상응하는 지혜로 무명의 뿌리를 몽땅 뽑아내고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어 걸림
없이 부사의업(不思議業)을 일으켜 시방의 무량한 세계에서 중생을 널리 교화한다.
? 허공이 끝이 없는 까닭에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는 까닭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는 까닭에 마음의 흐름[心行]도 차별되어 역시 끝이 없다. 이러한 경계는 끝이 없어 알기도 이해하기도 어렵거늘 무명이 끊어져서 영원히 마음의 모습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일체 종류를 요달하여 일체 종지를 이루는가?
? 일체 허망한 경계는 원래부터 사실은 오직 일심의 성품인데 일체 중생은 허망한 경계에 집착되어 모든 부처님들의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성품을 알지 못하거니와 모든 부처님께서는 집착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의 실다운 성품을 현전에 보고, 또 큰 지혜가 있어 일체 염․정법의 차별을 분명히 비추어 보고는 한량없고 끝없는 선교(善巧)한 방편을 써서 알맞은 바에 따라 중생을 이롭고도 즐겁게 한다.
? 부처님들께 끝없는 방편이 있어 능히 시방에서 걸린 없이 중생들을 이롭게 하신다면 두는 까닭에 중생들은 항상 부처님을 뵙거나 혹 신통변화를 뵙거나 혹은 설법하는 소리만을 듣지 못하는가?
? 여래에게는 실로 그러한 방편이 있거니와 중생들의 마음이 청정해진 뒤에야 몸을 나투시나니, 마치 거울에 때가 있으면 형상이 나타나지 못하다가 때가 제거되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서 마음에 때를 여의지 못해서는 법신이 나타나지 않다가 때를 여의면 바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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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수신분(修信分)인가? 이는 아직 정정쥐(正定聚)에 들지 못한 중생을 의지한다. 어떤 것이 신심(信心)이며, 어떻게 닦아 익히는가?
믿음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信根本]이니 이른바 좋아서 진여의 법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믿음[信佛]이니 끝없는 공덕이 갖추어졌음이요, 이른바 항상 정례하고 공경하고 공양하기를 좋아하며, 바른 법을 듣고는 법답게 수행하고 나아가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信法]이니 이른바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승가가 바르게 행함을 믿음[
信僧]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께 공양하고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바르게 닦기 때문이다.
다섯 부문의 행[五門行]을 닦으면 능히 이 믿음을 이룰 수 있나니, 이른바 시문(施門)․계문(戒門)․인문(忍門)․정진문(精進門)․지관문(止觀門)이다.
어떻게 시문을 닦는가? 이른바 어떤 중생이 구걸하러 오거든 자기의 물건과 재물로써 힘에 따라 베풀어 주어 자신의 인색함을 버리고 중생을 기쁘게 해 줄 것이요, 만일 어떤 중생이 위급한 환난에 시달리는 것을 보거든 방편으로 구제해 주어 두려움이 없게 해 줄 것이요, 만일 어떤 중생이 법을 구하러 오거든 자기가 아는 바에 따라 알맞게 말해 줄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보시를 수행할 때에 좋은 소문을 위하지도 않고 이익을 구하지도 않고 세간의 과보를
탐내지도 않고 오직 나와 남이 모두 이익하고 안락함과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할 것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닦는가? 이른바 재가보살이거든 살생․투도․사음․망어․양설․악구․기어․간탐․진질(瞋嫉)․첨광(諂誑)․사견을 여의어야 할 것이요, 만일 출가자이거든 모든 번뇌를 끊어 굴복시키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떠나 항상 고요한 데 의지래야 하며, 만족함을 아는 두타행(頭陀行) 등을 닦아 익히되 적은 죄라도 큰 두려움을 내어 참회하고 뉘우치며, 여래께서 지으신 금계(禁戒)를 잘 지키어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스러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하며
,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악을 버리고 선을 닦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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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인문(忍門)을 닦는가? 이른바 악한 것을 보아도 혐의치 않고 괴로움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항상 매우 깊은 진리의 말씀을 즐기어 관찰한다.
어떻게 정진문(精進門)을 닦는가? 이른바 온갖 착한 행을 닦되 마음에 게으르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과거 끝없는 겁부터 세간의 탐욕 경계를 구하기 위하여 헛되이 몸과 마음의 온갖 큰 고통만 얻었을 뿐 끝내는 조그마한 자미(滋味)도 없었다. 미래 세상에 이러한 고통을 여의기 위하여 마땅히 정진해서 게으름을 내지 말고 대비로써 일제 중생을 이롭게 하리라 한다.
이들 초학보살(初學菩薩)이 비록 신심 내는 법을 수행하나 전생부터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있으므로, 혹은 마(魔)에게 시달리고, 흑은 세속 업무에 얽매이고, 혹은 갖가지 병고에 쫓긴다. 이러한 일들이 장애를 이루는 것이 하나가 아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법 닦는 일을 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용맹하게 정진하여 밤낮으로 여섯 차례 부처님께 예배․공양․찬탄․참회․권청(勸請).수희(隨喜)하여 무상보리에로 회향하고, 큰 서원 세우기를 끊임없이 하
여 나쁜 업장이 소멸되고 선근이 늘어나게 한다.
어떻게 지관문(止觀門)을 닦는가? 이른바 온갖 희론의 경계를 쉬어 없애는 것이 지(止)요, 인과와 생멸의 모습을 분명히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하는데 처음에는 각기 따로따로 닦아서 차즘 늘어나서 성취하게 되면 자유로이 쌍으로 수행한다. 지(止)를 닦으려는 이는 고요한 곳에 가부좌(跏趺坐)를 틀되 몸은 단정하고 뜻은 바르게 하며, 기운과 호흡에 의지하지 말고, 형상과 빛에도 의지하지 말고 허공에도 의지하지 말고 지․수․화․풍에도 의지하지 말고 나
아가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기능에도 의지하지 않고 일체 분별과 상념(想念)을 모두 제거하고는 제거했다는 생각마저도 제거할지니, 온갖 법은 불생불멸이어서 모두가 일정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앞의 마음이 경계를 의지하거든 이내 경계를 버리고 뒤의 생각이 마음을 의지하거든 다시 마음을 버리며, 마음이 바깥 경계로 달리거든 곧 거두어들여 속마음에 머물러 두라. 그런 뒤에 다시 마음이 일어나거든 마음이란 상에 집착하지 말지니, 진여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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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좌․와 언제나 이와 같이 수행하여 항상 끊이지 않으면 차츰차츰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마침내는 온갖 번뇌를 굴복시키고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속히 이루겠거니와 만일 의심 내는 마음이 있어 비방하여 믿지 않거나 업장에 끄달려 아만과 게으름에 빠진 이들은 들어갈 수 없다.
또 이 삼매에 의하여 법계의 모습을 증득한 이는 일체 여래의 법신과 일체 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없음에 모두가 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나니, 그러므로 이를 일상삼매(一相三昧)라 한다. 만일 이 삼매를 닦아 익히면 무량한 삼매를 내나니 진여가 일체 삼매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혹 어떤 중생은 선근이 미소(微少)하기 매은에 온갖 마와 외도와 귀신이 유혹하고 어지럽히되 혹은 악한 형상을 나투어 두려움을 주거나 흑은 예쁜 여색으로 나타나서 그의 마음을 흘리거나 혹은 하늘 무리의 형상이나 보살의 형상이나 심지어는 부처님의 상호가 장엄하신 형상으로도 나타나거나 혹은 총지(總持)의 법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모든 바라밀을 설하거나 혹은 모든 해탈문(解脫門)과 원망 없음[無怨]․친함 없음[無親]․원인 없음[無因]․결과 없음[無果]
과 모든 법은 끝내 공적(空寂)하여 본 성품이 열반이라고 말하며, 혹은 과거와 미래의 일과 타심통을 알게 하기도 하며, 변재(辯才)와 이야기 솜씨가 막힘이 없고 끊임이 없게 하여 명예와 이양(利養)을 탐내게 하며, 혹은 자주 화를 내거나 자주 기뻐하게 하며 혹은 슬픔이 많거나 사랑이 많게 하며, 흑은 오래도록 참자기를 좋아하거나 혹은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게도 하며, 혹은 몸에 병이 걸리게 하거나 혹은 성품이 게으르거나 목은 갑자기 정진을 했다
가 곧 그만두게도 하며, 혹은 정에 의흑이 많아 믿음을 내지 못하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달리 잡된 업을 닦게 하며, 세상일에 애착되어 흠뻑 빠져 들어서는 입맛에만 따르게 하며, 흑은 외도들의 모든 선정에 들게 하되 하루, 이틀, 나아가서는 이레까지 이르게 하며, 선정 속에서 좋은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하며, 혹은 여색 등을 받아 누리도록 권하며, 흑은 음식의 분량을 갑자기 많다가 갑
자기 적게도 하며 흑은 그의 얼굴 모습이 예쁘게도 하고 밉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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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러한 모든 소견의 번뇌에 시달리면 곧 지난날의 선근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세히 살피고 관찰하여 생각하기를 ‘이는 모두가 나의 선근이 약하고 업장이 두터워서 마와 귀신 등에게 물렸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한다. 이렇게 안 뒤에는 저 모든 것이 오직 마음뿐이라고 생각할지니 이렇게 생각하면 찰나에 사라져서 모든 강을 멀리 여의고 참 삼매에 들게 된다. 마음의 상을 이미 여의고 참이라는 모습도 다하면 선정에서 일어나도 모든 소견과 번뇌가 모두 나타나지 않나니, 삼매의 힘으로 그 씨앗을 파괴시켰기 때문이다. 수승한
선법[善品]으로 수순하고 상속함으로써 온갖 장난을 모두 멀리 여의고, 다부진 정진을 일으켜 항상 끊임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 삼매에 의존치 않으면 여래의 종자성품[如來種性]에 들 수 없나니, 다른 삼매는 모두가 상이 있는 것이어서 외도와 함께 하므로 불․보살과는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 삼매를 부지런히 닦아 익히어 끝까지 성취하게 해야 한다.
이 삼매를 닦으면 생전에 열 가지 이익을 얻나니, 첫째는 항상 시방의 여러 불․보살님 보살피심을 받고, 둘째는 온갖 악마나 악귀의 시달림을 받지 않고, 셋째는 온갖 삿된 도에 홀리지 않고, 넷째는 깊은 법을 비방하던 무거운 죄와 업장이 모두 엷어지고, 다섯째는 온갖 의무과 나쁜 지식이 소멸되고, 여섯째는 여래의 경계에 대하여 믿음이 더욱 늘어나고, 일곱째는 근심과 뉘우침을 멀리 여의어 생사의 길거리에서 용맹하여 겁냄이 없고, 여덟째는 교만을 멀
리 여의고 부드럽고 화하고 인욕하여 항상 일체 세간의 공경을 받고, 아홉째는 설사 선정에 들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번뇌가 점점 엷어져서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고, 열째는 만일 선정에 들었으면 온갖 음성 등의 반연에 동요되지 않는다.
또 만일 지(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침체되어서 흑은 게으름을 내어서 온갖 좋은 일을 좋아하지 않고 대비(大悲)의 마음을 멀리 여읜다. 그러므로 관(觀)을 겸해서 닦아야 한다. 어떻게 닦는가? 이른바 세간의 모든 법은 생멸하여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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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하기 때문에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관하며, 과거의 법은 꿈같고, 현재의 법은 번개 같고, 미래의 법은 구름 같아서 잠깐 나타난 것이라고 관하며, 이 몸은 도두가 부정한 것이어서 온갖 벌레․때․번뇌들과 뒤섞였다고 관하며,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보는 모든 법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있다고 허망되게 계교한다고 관하며, 인연에서 생긴 모든 법은 모두가 허깨비 같아서 끝내 실체가 없다고 관하며, 제일의제(第一義諦)는 마음으로 미칠 바
가 아니어서 비유도 할 수 없고, 설명도 할 수 없다고 관하며, 일체 중생은 끝없는 예부터 모두가 무명이 훈습하는 힘 때문에 무량한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으며, 현재와 미래도 그와 같아서 가도 없고 끝도 없고 벗어나기도 어렵고 건너기도 어렵거늘 항상 그 안에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심히 가엾다고 관한다.
이렇게 관하고는 결정된 지혜를 내고, 광대한 자비를 일으키며 큰 용맹을 내고 큰 서원을 세운다. 바라옵건대 내 마음이 모든 뒤바뀐 전도를 여의고 모든 분별을 끊으며, 여러 불․보살님들을 가까이 섬겨 정례․공양․공경․찬탄하며, 바른 법을 듣고는 말씀대로 수행하되 미래 세상이 다하기까지 쉬지 않으며, 무량한 방편으로 고해의 일체 중생을 구제해서 열반제일의락(涅槃第一義樂)에 머무르게 하리라고 서원한다.
이렇게 서원한 뒤에 언제나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리이타의 행을 닦고. 행․주․좌․와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항상 부지런히 관찰해야 한다. 이를 일러 관(觀)을 겸해서 닦는다 한다.
또 만일 관(觀)만을 닦으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서 의혹을 많이 내고 제일의제에 수순하지 않으므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와 관을 겸하여 수행해야 하나니, 이른바 비록 모든 법은 모두가 자성이 없어 불생불멸하며, 본래 적멸이어서 본 성품이 열반이라고 생각하나 또한 인연이 화합하는 도리로 선․악 업보가 잃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보며, 비록 인연이 화합하는 도리와 선․악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일체 모든 법은 남[生]
도 없고 성품도 없고 나아가서는 열반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지(止)를 수행하는 이는 범부들의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대치(對治)하고 또 이승이 생사에 집착되어서 두려움을 내는 병을 대치하며, 관(觀)을 수행하는 이는 범부들의 선근을 닦지 않는 병을 대치하고, 또 이승의 대승심을 일으키지 않는 좁은 마음씨의 허물을 대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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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지와 관은 서로 돕는 것이어서 잠시도 여윌 수 없나니, 만일 지와 관이 갖춰지지 않으면 반드시 위없는 보리를 얻지 못한다.


<또 초학(初學)보살이 이 사바세계에 있는 동안 흑은 추위․더위․바람․비, 또는 때 아닌 주림의 고통 등을 만나기도 하고 흑은 착하지 못하고 두려운 중생들이 삼독(三毒)에 얽매이고 삿된 소견에 뒤바뀌어져서 착한 길은 등지고 나쁜 법을 익히어 행한다. 보살이 그런 속에 있기에 마음이 약해지고 겁을 내어 여러 불․보살님을 만나 뵙지 못할까 걱정하고 청정한 신심을 성취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의심을 내고 물러날 생각을 내는 이는 ‘시방에 계신 모든 불․보살님께서 모두가 큰 신통을 얻어 장애가 없으셨고, 갖가지 익숙한 방편으로 일체 위험하고 고단한 중생을 건져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는 큰 서원을 내되 일념으로 부처님과 보살님을 염하리라 한다. 이렇게 결정된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여기서 수명이 다하고는 반드시 다른 불국토에 왕생하여 불․보살님들을 뵈옵고 신심이 성취되어 영원히 악도를 여읜다. 경에서 “만일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서방극락세계아미타불을 오롯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 모든 선근으로 회향하여 왕생을 원하면 결정코 왕생하여 항상 그 부처님을 뵈옵고 신심이 증장하여 영원히 물러나지 않으며, 거기에서 법을 듣고 부처님의 법신을 뵈오며, 더욱 차츰 수행하여 바른 지위[正位]에 들어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復次初學菩薩住此娑婆世界或值寒熱風雨不時飢饉等苦或見不善可畏眾生三毒所纏邪見顛倒棄背善道習行惡法菩薩在中心生怯弱恐不可值遇諸佛菩薩恐不能成就清淨信心生疑欲退者應作是念:十方所有諸佛菩薩皆得大神通無有障礙能以種種善巧方便救拔一切險厄眾生作是念已發大誓願一心專念佛及菩薩以生如是決定心故於此命終必得往生餘佛剎中見佛菩薩信心成就永離惡趣如經中說:若善男子善女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以諸善根迴向願生決定得生常見彼佛信心增長永不退轉於彼聞法觀佛法身漸次修行得入正位)


어떤 것이 이익분(利益分)인가? 이와 같은 대승의 비밀구의(秘密句義)를 이제 간략히 말했으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히 깊은 경계와 광대한 법 안에서 맑은 믿음과 깨달아 아는 마음을 내어 대승의 도에 들어가되 장애가 없기를 바라거든 이 간략한 논을 부지런히 듣고 생각하고 닦아 익힐지니, 이 사람은 결정코 일체 종지를 속히 이룰 것이다. 만일 이런 법을 듣고 놀라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불종자를 계승하여 속히 수기를 얻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도(十善道)에 머물게 하더라도 잠깐 동안 이 법을 생각한 것만 못하나니, 앞의 공덕보다 지남이 무량하고 끝이 없을 것이요, 만일 하루 낮이나 하루 밤에 말씀과 같이 수행하여 생긴 공덕은 무량하고 끝이 없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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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시방 세계의 여러 부처님께서 각기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두고 말씀하선도 다할 수 없나니, 진여의 공덕은 끝이 없기 때문에 수행의 공덕도 역시 끝이 없다.
만일 이 법에 대하여 비방할 마음을 내는 이는 무량한 죄를 받아 아승기겁에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에 대하여 결정되게 믿을지언정 비방할 마음을 내지 말라. 스스로를 해치고 남도 해치며 삼보의 종자를 끊는다. 일체 모든 부처님께서 이에 의해 수행하셔서 위없는 지혜를 이루셨고, 일체 보살들이 이를 말미암아 여래의 법신을 증득하였다. 과거의 보살들도 이에 의하여 대승의 맑은 믿음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은 현전에 이루고 미래의 보살은
장차 이룬다. 그러므로 자리와 이타의 수승한 행을 완성코자 하는 이는 이 논을 부지런히 힘써 배워야 한다.

내 이제 매우 깊고 광대한
진리 말씀 해석해 마쳤으니
그 공덕 뭇 중생에게 돌려
모두가 진여의 법을 보게 하고자 하노라.



출처

https://deerpark.app/reader/T1667/1#0584a18

http://abc.dongguk.edu/ebti/c2/sub1.jsp

http://tripitaka.cbeta.org/T32n1667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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